뒤주가 타임머신이 될 수 있었던 까닭
《할아버지의 뒤주》(이준호 글/백남원 그림/사계절/2007년)
이 책은 묘한 재미가 있다. 그 재미는 책을 읽기 전 상상했던 것과 어긋나는 데서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보면 기대 심리가 맞아떨어져서 재미가 있을 때도 있지만, 이 책처럼 기대 심리가 어긋나는 데서 오는 경우도 있다. 기대했던 게 어긋나며 신선한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이나 등장인물, 그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들만 본다면 뻔한 이야기의 전형처럼 여겨진다.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가 당뇨병 때문에 혼자 살기 힘들어서 올라오면서 뒤주 하나를 애지중지하면서 가져온다거나,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거나, 자신의 잘못으로 끌려간 형을 잊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모습 등은 그 자체에서 통속적인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그런데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통속적인 느낌은 하나씩 사라진다.
뒤주는 할아버지가 괜히 애지중지 하는 게 아니다. 뒤주는 과거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중요한 장치다. 즉 뒤주는 일종의 타임머신인 셈이다. 하지만 다른 타임머신과는 다르다. 타임머신이 스스로 움직여서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뒤주는 늘 놓여있는 바로 그 장소에 그대로 있다. 뒤주 속에 들어간 사람이 뒤주 속에 있는 엽전을 몸에 지니면 그 순간 다른 시공간 속의 또 다른 뒤주로 통하는 길이 생긴다. 따라서 뒤주를 통해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공간은 제한적이다. 뒤주가 있는 곳은 대개는 과거, 또 우리나라(다른나라에도 뒤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다. 여기서 뒤주를 통해 미래까지도 갈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굳이 과거 역사 속으로만 가게 되는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할아버지의 존재도 흥미롭다. 겉모습만 보자면 병약한 노인이 틀림없지만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뒤주를 신주단지마냥 방에다 모셔놓고는 밤이면 아무도 몰래 뒤주 속에 들어갔다 나온다. 뒤주 밑에 둔, 바닥에 끌리도록 커다란 자물쇠가 있는 상자를 간직하고 있다. 또 텔레비전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 장면이라도 나올라치면 눈물이 글썽글썽하다. 감정이입 때문이라고 하기엔 눈물의 의미는 너무 절실하다. 고향이 남쪽이어서 남북이산가족과는 관계도 없는데 말이다.
이처럼 비밀을 간직한 뒤주와 할아버지가 민제의 방으로 들어온다. 방이 두 개밖에 없기 때문에, 뒤주를 마땅히 둘 곳이 없어서…… 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이야기를 읽다보면 이 역시 작가의 의도가 담긴 것임을 알게 한다. 한 방에 있게 된 뒤주와 할아버지와 민제는 뒤주를 통해 마치 ‘한 배를 탄 운명처럼’ 공범자(!)가 된다. 공범자. 이는 바로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뒤주가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특별함을 갖게 된 이유를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뒤주를 다시 본래의 평범한 뒤주로 되돌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 과정은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보통의 경우처럼 민제는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에 할아버지와 한 방을 쓰게 되지만 그 생활이 순탄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몸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로 상징되는 것처럼 한 세대를 건너뛴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간격은 그리 가깝지만은 않다. 하지만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생긴다. 할아버지와 민제 사이에 비밀이 생긴 것이다.
어느 날 잠결에 무슨 소린가를 듣고 잠이 깬 민제는 뒤주 안에서 나오는 할아버지를 발견한다. 뒤주에서 나오는 할아버지는 등산용 배낭을 메고, 턱까지 찬 숨을 몰아쉬고, 온몸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민제로선 엄청난 충격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지금 본 것을 아빠나 엄마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 비밀로 해달라고 한다. 할아버지가 뒤주 속에 들어간 이유는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채 말이다. 민제의 관심은 할아버지의 행동에 쏠린다. 할아버지가 뒤주에 들어가는 시간은 새벽 두 시 오십분. 하지만 뒤주에 머무는 순간은 너무 잠깐이다. 민제가 일어나려고 하면 바로 다시 나와 자물쇠로 잠근다. 결국 민제는 할아버지가 뒤주에서 나온 어느 날, 열쇠를 몰래 빼내 뒤주 속에 들어가 본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힌 건 엽전. 그리고 그 순간 바람이 불며 뒤주의 벽이 사라진다. 사라진 벽 너머로 나가자 그곳은 또 다른 뒤주. 그 뒤주의 뚜껑을 열자 그곳은 박물관. 다시 건너온 할아버지 뒤주에서 뚜껑을 열어보지만 뚜껑은 열리지 않는다. 쥐고 있던 엽전을 놓고 다시 밀자 그제야 뚜껑이 열렸다. 대신 민제가 건너온 쪽 벽은 어느 틈에 막혀있다.
뒤주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다. 뒤주는 또 다른 시공간 속의 뒤주로 연결되고, 이 연결에는 엽전이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민제는 이후 할아버지 몰래 뒤주로 시간여행을 한다. 사도세자도 만나고, 배비장도 만나고, 임진왜란의 현장에 가기도 하고, 1980년의 광주를 목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민제에게 현장을 들키듯이 민제도 할아버지에게 현장을 들킨다. 할아버지는 민제에게 뒤주의 비밀, 또 자신의 잘못으로 인민군으로 끌려간 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또 그 죄의식 때문에 큰할아버지를 만나려고 뒤주를 통해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두 시 오십분은 뒤죽박죽인 뒤주 속 시간 속에서 할아버지의 과거로 통하는 시간이라는 걸 발견하게 된 것, 또 뒤주에 들어가 있는 동안 뒤주 밖의 시간은 흐르지 않기 때문에 밖에서 보면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등 감춰두었던 모든 이야기를 해준다. 두 사람은 함께 뒤주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민제는 할아버지의 과거를 보며 할아버지에 대해 하나 둘 알아감에 따라 할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과 관계없어 보였던 역사의 한 순간은 할아버지로 인해 민제에겐 특별한 일이 된다. 이렇게 두 사람은 완벽한 공범자가 된다.
결론은? 해피앤딩이다. 드디어 북쪽의 큰할아버지한테서 연락이 닿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결론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여기선 평범하던 뒤주가 할아버지의 시간여행 도구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최후의 해결을 민제가 이어받게 된다는 점이다. 할아버지의 현실이기에 앞서 우리 모두의 아픈 현실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수십 년 전에 벌어진 일이라 지금 자라나는 세대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문제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민제처럼 받아들이고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민제가 할아버지의 공범자가 될 수 없었듯이 말이다. 또 작가는 할아버지의 문제 해결을 위한 뒤주 속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관계까지도 생각해 보게 한다. 과거란 우리가 섣부르게 개입해서 바꾼다는 건 위험하고도 복잡한 일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하나 하나 사건을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12호(2007년 11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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