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출발을 위한 작별 인사
《안녕히 계세요》(남찬숙 글/황보순희 그림/우리교육/2007년)
이 책은 만남에서 시작해 헤어짐으로 끝난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진다는 건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때때로 만남과 헤어짐은 한 사람의 일생을 뒤바꿔놓을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별다를 것 없어 보이던 만남이 특별한 만남이 되기도 하고, 그러다 헤어짐이 더 큰 의미로 남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만남과 헤어짐은 사람을 한 뺨은 더 크게 만든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누군가와의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다. 그 누군가는 다름 아닌 주인공 진영이의 아버지다. 아버지라고는 하지만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출소년과 가출소녀가 만나 서로 외로운 마음에 사랑을 했고, 그 결과 태어난 아이가 바로 진영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아버지는 그때 겨우 열여덟. 임신했다는 말 한마디에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사람이다. 당시 엄마는 열일곱. 모진 마음을 먹고 아이를 키웠고, 그래서 6학년 아들을 둔 엄마치고는 너무 젊다. 이제 겨우 서른이니까.
진영이가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 너무 젊은 엄마 덕분이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너희 엄마는 미혼모일지도 모른다던데’라는 말을 듣는다. 지금까지 아빠 얼굴 한 번 본 적 없고 집안에 사진 한 장 없지만 엄마 아빠는 사정이 있어 헤어졌고 조금 더 크면 만나게 될 거라는 엄마 말만 믿고 있던 진영에게 이 말은 충격이었다. 결코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진영이의 가족사다.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다.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고, 이를 통해 성장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진영의 현실을 사람들과의 특별한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 풀어나간다. 하지만 이야기의 최종 목표는 진영이가 엄마의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과 얼굴도 모르는 아빠와 혼자서 해야만 하는 이별이다. 자신을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생명을 준 아버지지만 정작 단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고, 그래서 더욱더 복잡한 갖가지 감정이 뒤섞이게 만든 아빠와의 이별은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작가는 이 헤어짐을 위해 진영에게 새로운 만남을 주선한다. 평범한 듯 보였던 만남이 어느 순간 특별한 만남이 되고, 특별한 인연이 되는 과정에서 힘을 얻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 첫 만남은 이야기의 시작에서 바로 등장한다. 옥탑방 아저씨와의 만남이다. ‘아저씨는 누구세요?’라는 소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 만남은 느닷없이 이루어진다. 비가 오는 날 빨래를 걷으러 옥상에 간 진영이는 자기네 빨래를 걷고 있는 아저씨를 보고 빨래 도둑으로 오해한다. 여러 가구가 사는 집이긴 해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다 여러모로 볼 때 좋은 인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낮 시간에 집에 있고, 누런 흰 티에 꾸깃꾸깃한 반바지와 슬리퍼, 덥수룩한 수염, 눈에 낀 눈곱까지, 좋게 봐 줄 수 있는 구석은 없다. 거기다 김치도 없이 라면을 먹는 모습은 청승맞기까지 하다.
이 책에서 옥탑방 아저씨와 만나는 이 장면은 무척 중요하다. 비가 오면 빨래를 걷으러 옥상에 뛰어 올라와야 하는 진영이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자, 진영이가 아버지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헤어질 수 있는 성장을 이루는 실마리가 이 옥탑방 아저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야기 속으로 좀더 들어가 보자.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된다. 옥탑방 아저씨와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난 뒤 진영이는 바로 아버지란 존재와 대면한다. 물론 이 대면은 직접 얼굴을 보는 게 아니라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실체 없는 아버지와의 만난다는 건 괴롭고 힘든 일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만 생길 뿐이다. 아빠와의 만남과 헤어짐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엄마를 향해 “차라리 죽었다고 하지. 죽었다고 하지!”하고 절규하고 만다.
진영이가 아빠란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옥탑방 아저씨의 말 한 마디 덕분이었다.
“무서워서 그랬을 거야.”
진영이는 우연히 길에서 옥탑방 아저씨를 만났고, 아빠와 같은 나이인 열여덟 살에 가출을 했었고 여자와 자기도 했다는 말을 듣고는 흥분하여 정신없이 엉엉 울며 아버지 이야기를, 자신의 심정을, 늘어놓는다. 아저씨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렇게 말했다. 진영이에게도 이 말이 마음에 와 박혔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옥탑방 아저씨는 왜 하필이면 아빠랑 똑같은 나이에 가출을 했었는지, 그리고 나쁜 짓도 하고 여자랑 자기도 했는지, 왜 아빠를 떠오르게 하는지, 이야기에서 다소 과도한 역할을 맡은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이 말 한 마디의 힘은 정말 강력했다. 옥탑방 아저씨가 주는 감동은 다음 날도 이어졌다.
“네 엄마 말이야. 넌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돼.”
옥탑방 아저씨는 겉으로 보기엔 제 앞가림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점점 특별한 사람이 된다.
재미있는 건 진영이 앞에 나타나는 남자 어른들의 모습이 모두 처음엔 그리 좋지 않다는 점이다. 옥탑방 아저씨가 그랬고, 느닷없이 진영이를 혼란에 빠트린 아빠란 존재가 그랬고, 엄마가 결혼하고 싶다고 한 아저씨가 그렇다. 이들의 또다른 공통점은 진영이가 생각하는 ‘아빠의 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빠와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고 아빠를 이해하게 해 줬고, 또 엄마랑 결혼해 새아빠가 될 사람이 아닐까 착각했던 옥탑방 아저씨, 자신에게 생명을 준 아빠, 또 엄마가 결혼하고 싶다고 소개해 준 휠체어를 탄 아저씨. 세 사람 모두 세상의 잣대로 볼 때 마이너 인생인 셈이다.
만약 엄마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아저씨가 아주 그럴 듯한 모습이었다면 어땠을까? 옥탑방 아저씨라는 기대가 무너졌어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을까?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겉모습에 가려 속을 제대로 못 볼 수도 없지 않았을까 싶다. 진영이가 좋아하던 혜인이랑 사귀자고 했을 때 잘 안 맞기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겉모습은 좀 부족한 것에서 출발하는 게 낫다 싶다. 꾀죄죄했던 옥탑방 아저씨가 멋진 남자로 보이고, 임신했다는 말 한 마디에 사라진 비겁한 아빠가 이해됐던 것처럼 휠체어를 탄 아저씨 역시 의미 있는 만남을 통해 좋은 아빠가 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진영은 휠체어 아저씨를 받아들인 뒤 주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한다. 표면상 이유는 엄마의 결혼으로 이사를 가는 거지만 그 이면에는 홀로서기를 하며 성장하는 진영이가 있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04호(2007년 7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어린이책 관련 > 우리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국기 소년 (0) | 2021.03.29 |
---|---|
장건우한테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0) | 2021.03.28 |
화장실에 사는 두꺼비 (0) | 2021.03.25 |
할아버지의 뒤주 (0) | 2021.03.22 |
밴드마녀와 빵공주 (0) | 2021.03.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