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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우리창작

할머니 집에서

by 오른발왼발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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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집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할머니 집에서》(이영득 글/김동수 그림/보림/2006년)

 

 

이 책은 참 매력적이다. 시골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낸 글에서, 또 조금은 단순한 듯 그린 그림에서 매력이 넘쳐난다. 여기에 이 책이 초등 1-2학년이 읽기에 적당한 책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다. 한번 보고 나서 또 한번 들쳐보니 웃음이 씨익 절로 나온다.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사실 이 책을 사다놓고 한동안 다른 책들에 밀려 보지 못하고 있었다. 60쪽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책이지만 이렇게 선뜻 읽지 못한 데는 까닭이 있다. 시골 할머니 집을 배경으로 한 많은 책들이 대개는 뭔가를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에 읽고 나서 기분이 개운치 못했기 때문이다. 자연의 소중함에 대해서, 음식의 소중함에 대해서, 혹은 농사의 소중함에 대해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엔 ‘그러니까 잘 알았지? 이렇게 살아야 해!’ 하는 식의 훈화로 끝나거나 ‘예전에 이랬는데 요즘엔 문제가 있다’는 식의 회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달랐다. 「내 감자가 생겼어요」, 「또글또글 망개 목걸이」, 「말 잘 듣는 호박」, 「꼬꼬꼬, 닭이 아파요」. 이렇게 네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마치 할머니 집에 다녀오고 난 뒤의 그림일기를 보는 듯 아이의 모습이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좋은 일기란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자기 이야기만을 하듯이, 이 책의 주인공인 솔이 역시도 시골 할머니 집에 가서 보고 겪고 느낀 점을 일인칭 화법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토요일마다 자주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일을 해야 하는(!) 엄마 아빠의 마음이나 혹은 할머니 집에서 엄마 아빠와 있었던 일 같은 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심심하기만 했던 시골이 재미있는 곳이 될 수 있었던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새로운 놀이를 발견했을 때 다른 건 보이지 않고 오로지 그 놀이에만 집중하게 되듯이 솔이는 시골 할머니 집에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몰두할 뿐이다. 그 모습에서 아이다움이 느껴진다.
아이가 발견한 시골의 재미는 이런 식이다. 하얀 꽃이 가득 피어있는 감자밭에서 자줏빛 감자 꽃을 발견하고 자신의 감자로 삼은 것, 친구가 없어 심심했던 시골에서 망개 목걸이랑 팔찌 덕분에 상구랑 친구가 된 일, 암꽃을 못 피는 호박한테 새끼줄로 내리치며 야단을 쳐서 호박을 맺게 한 신기한 할머니. 아이는 시골에서 신기하고 재미있는 세계를 발견하는 중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았어도 신기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가 생긴다.
이런 아이의 모습은 도시에 살면서 가끔씩 엄마 아빠를 따라 시골 할머니 집에 내려오고, 일에 대한 부담은 없는 대신 심심한 시골에서 뭔가 새로운 놀 거리를 찾아내는 초등 1-2학년 또래의 모습이다. 조금은 천방지축이면서 단순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도시에서 사는 아이들의 눈으로 볼 때는 자신의 모습 그대로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아이의 생생한 캐릭터가 이 책의 장점 가운데 하나다.
살아있는 캐릭터는 또 있다. 바로 할머니다. 할머니는 집에 전화해서 “솔이냐? 할미다. 내일 할미 집에 올 끼가?”하고 단도직입으로 물으며 솔이 네가 내려오기를 채근하기도 하면서도 시골에 내려오느라 고생했다며 엄마아빠에게 낮잠을 권하곤 슬며시 혼자 일어나 일을 보기도 한다. 할머니 역시도 적당히 시어머니다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론 한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순박한 모습을 동시에 지닌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생생한 캐릭터가 펼쳐내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시골의 풍경과 사정, 그리고 자연의 소중함을 느끼게 하면서도 그걸 내세우기 보다는 이야기의 바탕에서 든든하게 받쳐줄 뿐이다. 가르침 내신에 그냥 아이들이 읽어나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느끼게 해주는 것,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림의 매력
이 책은 그림책이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하지만 그림이 차지하는 몫은 대단히 크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인 솔이의 이야기에 그대로 빨려 들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그림일기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그림의 영향 또한 크다.
그림일기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건 이야기 시작 면 때문이다. 그림일기처럼 쪽의 윗부분에 커다랗게 이야기와 관련이 된 그림을 채워 넣고 아래는 일명 깍두기공책에 아이의 글씨로 제목을 써넣은 것이 영락없이 그림일기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림은 마치 아이의 그림처럼 단순해 보인다. 그래서인지 솔이가 오늘 할머니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종알종알 이야기를 늘어놓는 듯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된다.
놀라운 건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감정 표현도 절제된 듯한 그림에서 너무나 풍부한 이야깃거리와 인물들의 감정을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 집에 내려가는 길이나 감자밭의 모습처럼 한 면 가득 그림이 채워진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글 중간 중간 작은 그림이 감초처럼 끼어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그림들이 아이들에게 다소 낯설을 수 있는, 시골에서 벌어지는 여러 상황이나 인물들의 감정을 한눈에 들어오게 한다.
또 때로는 말풍선을 이용하기도 했는데, 대개 그림책에서 말풍선이 글에서 나오는 말을 대신해 주는 것과 달리 다른 그림과 마찬가지로 말풍선 속의 글 역시도 그림의 일부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즉 말풍선 속의 글은 글만 읽을 때는 빼고 읽어도 상관이 없는, 그림과 같은 시각이미지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열려라, 참깨!
낮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이야기하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책. 이 책은 그렇다. 소리 높여 시골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결국엔 마음을 활짝 열게 만든다. 시골이 싫었던 마음은 자줏빛 감자꽃 때문에 열렸고, 촌뜨기 같아 마음에 들지 않던 상구도 망개 목걸이를 계기로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된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고 나니 농사가 잘 되길 바라며 “열려라, 참깨!”하고 할머니 흉내를 내 보기도 하고, 병이 난 상구네 닭들을 치료하는 데에도 관심이 많아진다.
앞으로 시골을 다루는 책들도 이 책처럼 이렇게 나왔으면 좋겠다. 가르치려 소리 높이지 않고 말이다. 이럼 마음을 담아 나도 주문을 외어봐야겠다. 열려라, 참깨!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196호(2007년 3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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