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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우리창작

만국기 소년

by 오른발왼발 2021.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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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현실, 희망의 빛

《만국기 소년》(유은실 글/정성화 그림/창비/2007년)

 

이 책은 유은실의 첫 번째 단편 모음집이다. 사실 난 개인적으로 이 책이 나오길 꽤나 기다렸다. 2004년 등단했으니 이제 3년 정도 밖에 안 된, 아직 신인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작가의 이력이다. 하지만 이미 『나의 린드그린 선생님』(창비)과 『우리 집에 온 마고할미』(바람의아이들)를 통해 작가 유은실은 자신만의 매력을 보여주었던 터이다. 게다가 이번 단편 모음집에는 이미 2004년 『창비 어린이』 겨울호에서 발표했던 「내 이름은 백석」과 2005년 『내일을 여는 작가』 봄호에서 발표했던 「만국기 소년」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전에 이미 이 두 작품을 읽었고, 그때마다 짠한 감동을 느껴본 경험이 있기에, 이 두 작품이 포함된 단편집이라는 것만으로도 더욱 반가웠다.

이 책에는 모두 아홉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우선 작품마다 씁쓸하고 슬픈 인생사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것도 겉으로 드러난 분위기는 유쾌한 듯 싶으면서, 실은 엄청나게 힘들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어이, 닭대가리” 하고 부르면 “꼬끼오.” 하며 웃는 아버지(「내 이름은 백석」), 거침없이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쏟아내는 진수(「만국기 소년」), 비록 천 원이긴 하지만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생긴 두 자매(「맘대로 천 원」),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고민을 하는 대신 친할머니와 외할머니가 경쟁적으로 키워주고 싶어하는 선아의 생활(「선아의 쟁반」). 어떻게 보면 여유가 있어 보이기도 하고, 기분 좋은 일인 듯도 싶지만 이내 이들의 힘든 상황을 눈치채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선아의 쟁반」을 뺀 나머지 8편은 모두 일인칭인 ‘나’의 서술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나’가 서술자가 된다는 서술자 시점에서 보이는 것이나 서술자의 마음을 집중해서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장 돋보이는 특징은 굳이 설명투의 문장이나 직접적으로 감정으로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신 사건들을 연이어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등장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모든 걸 사건 중심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옛이야기의 문체와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이야기에 대한 집중력은 더욱 높아진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만국기 소년」은 이런 작품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다.
「만국기 소년」은 전학 온 첫 날 뭐든지 잘 하는 것을 하라는 선생님 말씀에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외우는 진수, ‘나’가 지켜본 컨테이너 박스에 사는 진수네 가족, 그리고 막힌 싱크대 배수구를 수리하러 왔던 진수 아빠에 대한 이야기가 번갈아 나온다. 다시 말하자면 진수가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외우는 동안 ‘나’가 진수랑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떠올리는 상황이다. 기껏해야 몇 분 정도의 시간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독자는 진수의 상황을 다 짐작할 수 있다. 왜 컨테이너 박스에 살게 됐는지, 가족들은 누구누구가 있는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일은 무언지, 그렇게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잘 외울 수 있게 된 까닭은 무언지를 말이다. 이는 그냥 말로 하려면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 사연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삽화까지 11쪽 정도의 분량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해낸다. 짧은 단편일수록 밀도가 높아야 한다는 점을 생각할 때 정말 탁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 인물 가운데 진수를 이해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는 길모퉁이 주차장 구석에 세워진 컨테이너 박스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렇게 작은 집에 저렇게 많은 식구들이 살게 된 이유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는 야구에, 엄마는 막힌 싱크대 구멍만 들여다 보고 있었고, ‘나’는 육학년이 된 다음부터는 나를 보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말 걸기가 싫어졌다. 결국 ‘나’ 스스로 관심을 갖고 관찰하며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진수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을 외워대는 모습만 관심을 보이는 선생님과 아이들은 진수의 슬픔을 모른다. 누구나 다 ‘북한’이라고 말하는데 왜 유독 진수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하는지, 그 미묘한 차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 왜 진수에게 표정이란 게 없는지도 관심 밖이다. 아이가 넷이라는 말에 ‘너무 많이 낳았다.’고 말하는 엄마나 ‘네가 외운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에 가 보고 싶느냐’고 묻는 선생님이나 모두 상대에 대한 배려없이 자기 기준에서 판단해버리는 우리이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변별성은 삽화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삽화는 여섯 쪽에 걸쳐 하나의 그림으로 이어져 있는데, 작은 교실 문에서 만국기가 이어져 나오고 있고 한 장을 넘기면 그 만국기는 진수의 입으로, 또 진수의 입은 배수관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다시 한 장을 넘기면 그 배수관이 ‘나’의 입과 연결되어 있다. ‘나’가 캑캑거리는 모습을 한 건 싱크대 배수관이 막힌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의 마음이 이렇게 답답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기막힌 삽화가 나올 수 있었던 건 우선 그림 작가인 정성화의 능력이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거침없이 입으로 만국기를 뽑아내는 진수의 모습과 물이 내려가지 않아 답답해하는 엄마가 싱크대에 화를 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목이 갑갑해지는 것, 또 결국은 그 싱크대를 진수 아빠가 와서 고치게 된다는 상황을 선명하게 연결시켜주는 글의 힘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작가의 치밀함은 「내 이름은 백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닭집이 ‘큰거리 시장’에 있으니 ‘큰거리 닭집’이라 해도 좋았을 텐데, 큰 대(大)로 바꾸면 유식해 보일 것 같아서 ‘대거리 닭집’이라 이름 붙였다가 별명이 ‘닭대가리’가 되어 버린 아버지. ‘백’이라는 성이 쓰기가 어려워 아들이 이름을 쓰기 편하게 하려고 단 두자인 ‘백석’이라 이름 붙였는데, 알고 보니 백석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천재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나중에 아빠처럼 닭을 자르고 살아도 똑똑한 친구를 한 명은 꼭 사귀라는 말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자괴감이다. 하지만 결코 여기에 빠져 있지는 않는다. 목이 길게 달려있는 닭이 신선한 것이라며 닭을 두 손에 쥐고 흔드는 모습은 가슴 짠한 감동을 준다.

책을 덮으니 계속 사람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천원이라도 맘대로 쓰고 싶어 했지만 이마저 맘대로 안 되는 아이, 할머니에게 늘 착한 아이였던 엄마 아빠 덕분에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선아, 조카에게까지 이런저런 하소연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어떤 이모부……. 이들을 오래도록 잊기 어려울 듯 싶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00호(2007년 5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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