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사람을 만나다》(김여운 글/전종문 그림/바람의아이들/2006년)
개가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주인을 잃고 이름도 없이 거리를 떠돌아다니던 개가 한 아줌마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전의 이름이었던 ‘세나’ 대신 ‘초롱이’라는 이름을 새로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표지에 참치 캔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개의 모습이 그려있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떠돌이 개가 사람, 즉 새로운 주인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개가 사람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철저하게 개의 시선으로 전개됩니다. 개가 바라보는 세상과 사람, 다른 개들의 모습, 또 주인공 개의 심리적인 갈등과 성장해나가는 모습까지.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세나’라는 이름에서 ‘초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게 단순히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이 바뀐다는 건 단순히 이름이 바뀐 게 아니라 새로 태어났다는 의미까지도 부여할 수 있을 만한 대단한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두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 책의 겉에 드러나 있는 내용입니다. 즉 어느 날 주인을 잃어버린 개가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는 과정을 개의 입장에서 느끼게 해 주죠. 이렇게만 읽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주니까요.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개와 사람의 관계만은 아닐 것입니다. 비록 개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기는 하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과 전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버려진 개 세나가 되어 그 모든 일을 함께 겪었지요. 마침내 불안한 평화에 매달리는 세나가 아니라 자존감을 가진 한 존재로서 행복을 맞이하는 개 초롱이가 되었을 때 나는 정말 기뻤어요. 그리고 상처를 딛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지요."
작가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세나는 엄밀히 말해서 주인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버려진 개였습니다. 사실 옛 주인은 세나를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아기를 대하듯 개를 보살펴주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멋쟁이 주인은 세나에게 부족한 것 하나 없이 대해줬고, 세나도 그런 주인을 무척이나 따랐습니다. 문제는 주인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으로서는 부인이 세나에게 애정이 쏟으면 쏟을수록 세나가 미워졌던 것 같습니다. 결국 부인이 외출한 사이에 차를 태워 먼 곳에 버립니다. 이렇게 세나는 떠돌이 개가 되었습니다.
새로 만난 주인은 여러 모로 옛 주인과 차이가 있습니다. 옛 주인이 부잣집 사모님 분위기라면 새 주인은 변두리에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습니다. 옛 주인처럼 사근사근하지도 않고 다정하게 대해주지도 않지만 오히려 조금은 무심해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끌립니다. 초롱이는 여전히 옛 주인을 그리워하면서도 동시에 이전의 넓고 따뜻했던 집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아줌마로부터 느낍니다.
새 주인이 이토록 편안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요? 이야기가 시작하자 바로 새 주인이 된 아줌마를 만나지만 진심에서 새 주인으로 아줌마를 받아들이는 건 이야기가 끝이 날 때가 되어섭니다. 그리고 그건 바로 작가가 말하고 있는 ‘자존감’ 때문일 겁니다.
초롱이는 자신을 낯선 곳에 버린 옛 주인의 남편과 닮은 사람을 보고는 정신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꿈속에서 옛 주인이 다정하게 부르며 다가오자 “날 사랑하기만 하고 바보로 만들었어!” 하고 외치며 깨어납니다. 주인이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을 위해 모든 걸 다 해준 것 같지만 결국 일방적인 관계였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즉 옛 주인은 세나가 자신의 틀에서만 움직이도록 길들였고, 그 속에서 자신은 자존감을 내팽개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이에 반해 새 주인은 그저 무심한 척 있지만 늘 초롱이를 지켜보며 신경써주고 있습니다. 또 초롱이는 은근히 아줌마를 든든하게 지켜줍니다.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고, 이를 존중해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렇게 초롱이는 주인의 비유를 맞춰주며 귀여움만 받던 세나에서 스스로 자존감을 찾아갑니다.
비록 개의 이야기지만 사람의 이야기로 읽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주위의 사람들과 어떤 관계로 만나고 있는지 자꾸 생각하게 합니다.
옛 주인과 새 주인 외에 초롱이가 만나게 된 다른 개들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초롱이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건 털복숭이입니다. 털복숭이는 모든 것에서 교훈을 얻고 그 교훈을 떠돌이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양식으로 삼습니다. 어찌 보면 마치 도인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지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반면 잿빛털의 모습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합니다. 초롱이가 좋다면 무작정 쫓아다니며 괴롭히지만 털복숭이의 말마따나 ‘알고 보면 불쌍한 놈’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감정만 앞세울 뿐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행패만 부리는 꼴이 되고 그래서 점점 외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옛 주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물론 옛 주인과는 정반대입니다. 초롱이의 기분 같은 건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감정만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서로 다름에도 둘은 서로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관계란 서로를 인정해주고 지켜주는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요.
오랜만에 깊은 여운을 주는 작품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짧은 분량(63쪽)이지만 깊이는 결코 짧지 않습니다. 중간 중간 진한 글씨로 쓰인 초롱이의 사색, 마지막 장면에 털복숭이와 강물이 흘러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은 어쩐지 작품 속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야기의 맥이나 감정이 끊어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뒤부터 누군가와 관계에서 조금 불편해지는 순간, 이 책이 떠오릅니다. 작가와 작품, 모두 오랫동안 가슴에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184호(2006년 96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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