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기억하고 싶은 조선의 과학자들
《하늘의 법칙을 찾아낸 조선의 과학자들》
(고진숙 글/유준재 그림/한겨레아이들/2006년)
조선 시대 과학자라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장영실이다. 이는 내가 과학에 문외안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산업계에 한정되어 있긴 하지만 ‘장영실 상’이라는 건 있어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딴 상은 없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의 과학자들을 다루고 있는 이 책에 그 유명한 장영실의 이름은 없다. 이순지, 정초, 이향, 김석문, 홍대용, 지석영. 아는 이름도 있지만 낯선 이름이 많다. 이향은 문종의 본 이름이기 때문에 모를 수 있다지만(세자 때 활동이긴 해도 문종이라 하지 않고 이향이란 이름으로 서술한 것도 새롭다.) 그나마 아는 이름이 홍대용과 지석영 정도다. 조선, 하면 과학과는 별 관련이 없는 줄만 알았는데 도대체 그동안 왜 이런 인물들을 모르고 지나갔는지 궁금해진다.
이 책은 ‘숨은 역사 찾기’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다. 시리즈 이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미 앞서 나온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과 『아름다운 위인전』 역시 우리가 역사 책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다. 이순신을 뒤에서 묵묵히 도운 숨은 일꾼들, 또 나눔과 베푸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물론 여기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속속들이 알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인물의 생애를 쭉 훑어가며 서술하는 인물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각각의 인물은 그 사람이 이룬 여러 가지 일 가운데서도 과학, 그 가운데서도 또렷하게 업적을 남긴 것을 주제 삼아 풀어나간다. 그리고 그 주제는 이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하늘의 법칙’과 관련된 과학이다. 각 인물들이 어떤 주제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순지는 ‘새로운 하늘을 펼쳐 보이다’라는 주제로 해와 달과 별들의 각도를 재는 간의대의 책임자로서 하늘을 관측하며 우리만의 달력을 만들어낸 과정을 보여준다.
정초는 ‘우리만의 농사책을 만들자’는 주제로 『농사직설』을 펴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농사 짓는 법에 관한 책과 ‘하늘의 법칙’이라니! 쉽게 다가오지 않는 면도 있다. 그러나 농사 일이란 기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농사와 하늘의 법칙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이향은 ‘근대 기상학의 문을 열다’라는 주제로 측우기를 만들게 된 과정을 집중해서 보여주고 있다. 흔히 측우기는 장영실이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장영실이 아니라 이향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측우기를 만든 건 단순히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서만은 아님을 알게 한다. 측우기는 언제 어디서나 똑같은 기준으로 강우량을 측정하고 통계를 낼 수 있기에 홍수나 가뭄 같은 날씨를 예측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 셋은 모두 세종 때의 인물이다. 세종 때 조선의 천문학은 동양 최고 수준이었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된다. 양반이면서도 산학을 좋아하고 역법에 관심을 갖고 있던 이순지, 뛰어난 수학 실력과 함께 백성들을 추위와 굶주림에서 구하기 위해 농사일에 적극 뛰어들었던 정초, 게다가 세자이면서도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이향. 그리고 노예 신분이었던 장영실도 과감하게 기용할 줄 알았던 세종. 동양 최고 수준의 천문학은 이들 모두의 힘이 합해진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향 다음에 나오는 인물인 김석문이 등장하기까지는 250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만다. 이는 세종 이후 250여년 동안 조선의 과학이 침체기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김석문은 과거 시험을 한 번도 보지 않고 혼자서 책을 보고 생각하면서 하늘의 움직임을 공부해서 지구가 스스로 돌고 있음을 알아낸 인물이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을 했다. 비록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태양계와는 많이 다르지만 망원경 조차 없던 당시로는 아주 획기적인 발견이었으며, 세계관을 뒤흔드는 사건이었음이 틀림 없다.
한편 홍대용의 경우도 실학자로서 다방면에서 주목을 받고 있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그가 하늘의 법칙을 증명할 수 있는 새로운 생각을 찾으려는 노력에 중심을 두고 서술하고 있다. 농수각이란 개인 천문대를 만들어 혼천의와 망원경으로 천체의 위치와 움직임을 관찰하며 천문학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려 했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렇듯 ‘하늘의 법칙’을 찾으려 노력한 각 인물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그 인물들의 삶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조선의 천문 과학사의 흐름이 먼저 보인다. 이 책이 과학자들 이야기이지만 단순한 인물 이야기가 아닌 까닭이다. ‘조선의 과학자들을 통해 본 조선의 천문학의 역사’라고나 할까?
이에 걸맞게 이 책은 우리가 잘 몰랐던 천문학과 관련된 각종 정보들이 가득하다. 자칫 정보 상자가 너무 많으면 산만하게 보이고 이야기의 맥이 끊기기 쉽지만 이 책은 관련 인물들을 천문학과 관련된 하나의 시각에서만 접근을 했기 때문에 이들 정보가 오히려 굉장히 유익하게 읽힌다. 또 각 인물을 다루고 난 뒤에는 그 인물과 비슷한 일을 한 서양 과학자들과 견주고 있는데 이는 어느 한쪽의 쏠림이 없이 동서양의 과학자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책에서 좀 어색한 건 지석영 편이다. 여섯 명의 과학자 가운데 마지막에 ‘예방접종으로 천연두를 극복하다’라는 주제로 지석영을 다루고 있는데, 지석영은 이 책의 ‘하늘의 법칙’이라는 주제와 아무래도 어울리지가 않는다. 왜 지석영을 집어넣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지석영 편 하나만 떼어놓고 생각하면 문제가 될 건 없지만 안 들어간만 못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은 큰 의미가 있다.
첫째, 이야기하고자 하는 기본 주제를 중심으로 인물에 접근을 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 인물에 대한 삶 전체를 다루거나 혹은 삶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한 서술 방식이 갖는 오류와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한 방향에서 인물을 알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즉 인물의 장점을 강조하기 위해 미화되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얼토당토 않게 지어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의 주제로 관련된 인물들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던 새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즉 여러 가지 이유로 역사에 기록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도 아우를 수 있는 틀을 만들어낸 것이다.
셋째, 하나의 주제로 모아놓은 인물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제사로 읽어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마치 이 책에서 다섯 명의 인물들을 통해 조선 천문학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190호(2006년 12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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