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씨앗이 자라서……
《나는 무슨 씨앗일까?》(박효남 외 글/유준재 그림/샘터/2005년)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받는 질문이다. 아니, 한번이 아니다. 어른이 될 때까지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질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질문을 받은 아이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곰곰 생각한다. 어린 아이들일수록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다 보니 대개 처음엔 가장 멋져 보이는 사람, 가장 힘이 세 보이는 사람을 꼽기 마련이다. 내가 어렸을 때 친구들의 대답 가운데 가장 많았던 건 대통령, 장군, 군인, 과학자, 선생님, 의사였던 것 같다. 가장 평범한 대답 가운데 하나는 ‘현모양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대통령, 장군, 군인, 현모양처 같은 꿈을 꾸는 아이들은 사라졌다. 대신 가장 인기있는 건 연예인이다. 1970년대와 2000년대의 달라진 사회 분위기를 대변하는 것이리라 여겨진다.
그런데 아무래도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은 어른들이 만족을 얻기 위한 질문이란 혐의가 짙어 보인다. 아이들의 답을 듣는 어른들의 표정이 이를 짐작케 해준다. 아이의 답이 어른(부모)가 바라는 답과 일치하면 흐뭇한 미소가 넘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금방 얼굴이 일그러지기 일쑤다. 때로는 어른의 바람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일도 벌어진다. 어쩌면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 속에는 아이에게 위인전을 많이 읽히면 아이가 그 위인을 본받아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어른들의 바람이 맞물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른들의 이런 질문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아이들에게 삶의 다양한 세계를 아무런 편견없이 보여주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건 아닐까 싶다. 또 그저 겉모습만으로 정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한다는 건 어떤 건지, 또 이를 위루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그 모습도 알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큰 의미가 있다. 그 첫 번째 의미는 제목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하고 묻는 게 아니라 “나는 무슨 씨앗일까?”에 대해 자기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책을 읽는 아이들 하나하나가 어떤 싹이 틔우고 커나갈지는 몰라도 결국 자신이 싹을 틔워내고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는 씨앗과 같은 소중한 존재라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또 있다. 새로운 인물 이야기의 가능성이다. 이 책에는 모두 9명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총주방장 박효남, 자연과학자 최재천, 컴퓨터 의사 안철수, 시각장애인 박사 강영우, 나무박사 서진석, 화가 김점선, 기자 김병규, 민속학자 임재해, 농부 이영문. 이렇게 한 권의 책에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보다 더 특별한 건 이들 자신이,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를 들려준다는 점이다.
물론 이렇게 한 권에 여러 명의 인물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도 있고, 또 이처럼 살아있는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인물 이야기와는 다른 특별함이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이 책에 담긴 인물의 성격, 또한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 서술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 여겨진다.
일단 이 책에 담긴 인물들 가운데는 생소한 사람이 많다.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 대부분이다. 직업도 다양하다. 총주방장, 시각장애인 박사, 민속학자, 농부와 같이 지금까지의 인물 이야기에서는 보기 힘든 인물들도 있다. 아이들이 이 인물들의 삶과 동일시하며 읽어낼 수 있을까 싶지만 이런 생각은 책을 읽다보면 금방 사라진다. 조금의 가감도 없이, 꾸밈없이 담담하게 펼쳐놓는 이야기가 오히려 인물이 살아온 삶에 공감할 수 있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직접 전선에 뛰어든 박효남은 요리에 재미를 느끼면서 요리에 전념을 할 수 있었고, 요리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자 하는 마음으로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의 과정은 물론이고 요리를 잘 할 수 있기 위한 공부라면 어느 것이든 끊임없이 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주방장이 아니라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시각장애인 박사 강영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열세살이 되던 해부터 열여섯 살 때까지 일어난 불행 - 아버지의 죽음, 축국공을 눈에 맞아 앞을 못 보게 된 상황, 어머니의 죽음, 누나의 죽음, 동생들을 돌볼 수 없는 상황에서 두 동생을 떠나 보내고 맹인재활원에 들어가며 뿔뿔이 헤어져야 했던 상황 - 속에서도 꿋꿋하게 노력해 박사 학위를 따기까지의 과정은 눈물 겨운 과정임에 틀림없다. 자칫 그 부분이 강조되고 길어졌으면 그냥 감상주의에 빠져들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껏해야 16-18쪽 내외인 글의 양은 애초에 그럴 여지를 차단시켜 줌으로써 오히려 더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이뿐 아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다가 친구가 “내일 모두 모여 같이 죽자.”고 한 말에 기꺼이 동의를 하고 난 뒤에야 세상에서 꼭 하고 싶었던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화가 김점선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답을 지금 당장이 아니라 좀더 느긋하게 결정할 수도 있겠다는 여유로움이 생긴다.
어려서는 촌놈, 갈비씨, 가시나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내성적인 성격, 그리고 중고등학교는 물론이고 대학까지 한 번에 합격해 본 일이 없었다는 민속학자 임재해의 이야기는 자신감 없는 아이들에게도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모두 저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소중한 하나의 씨앗인 아이들, 그 씨앗이 제대로 싹을 틔우고 자라려면 알맞은 조건을 마련해주고 기다려주는 게 가장 좋은 일일 것이다. 싹은 빨리 틔울 수도 있고, 늦게 틔울 수도 있다. 그 차이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리라. 이건 어른들이 가져야 할 자세이고 말이다.
오랜만에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었던 인물 이야기였다. 앞으로도 좀더 새로운 인물의, 새로운 시도의 인물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아이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만나게 해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35호(2005년 12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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