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미움과 사랑 사이
《우리 아빠는 백수건달》(장여우위 글/심봉희 옮김/대교출판/2005년/절판)
이 책의 주인공 천다러의 아빠는 백수건달이다. 아니, 그냥 백수건달이라고만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백수건달이란 하는 일 없이 빈둥대며 생활하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이니까. 천다러의 아빠는 미용실을 해서 겨우겨우 생활을 해 나가는 엄마한테 돈을 강탈하듯 가져가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도박판에 빠져 산다. 툭하면 집에서건 밖에서건 엄마랑 서로 치고 받으며 격렬하게 싸우기도 한다. 온 몸에는 알록달록한 꽃과 용 모양의 문신을 새기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유괴하는 일까지 벌인다. 빚쟁이들이 몰려오면 자신은 방에 들어가 꽁꽁 숨어버리고 모든 뒷감당을 가족들에게 떠맡기기도 한다.
이쯤 되면 천다러의 신세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천다러가 이런 아빠 때문에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선택한 방법은 열심히 공부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1등을 했고 반장이 됐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천다러의 친구 엄마들이 자기 아이가 천다러 집에 가는 걸 꺼리기는 매한가지다. 게다가 아빠는 엄마에게만 손찌검을 하는 게 아니다. 어떤 때는 천다러와 동생에게도 영향이 미친다. 아빠가 도박에서 돈을 잃거나 술을 마시기라도 하면 끽소리도 못하고 숨어있어야만 하는 처지다.
천다러와 동생은 많은 어른들이 다른 집 아이와 자신의 아이를 비교하듯 아빠를 다른 집 아빠와 비교한다. 그리고 그럴 때면 항상 기가 죽는다. 특히나 아빠에 대해 글짓기를 해야 할 때면 더욱 괴로워진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천다러의 처지가 아니라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럴 것이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한두 번쯤은 아빠가 창피하다고 여기는 일이 있다. 때로는 그런 마음이 지나쳐 ‘이런 아빠는 차라리 없어졌으며’ 하고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아빠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자신이 창피하게 여기는 부분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뿐이다. ‘아빠가 이렇지만 않으면 정말 좋을 텐데’ 하는 마음 말이다.
그리고 작가는 바로 이런 아이들의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그래서 비록 천다러 아빠의 모습이 보통 아빠와는 다른, 뉴스 시간이나 ‘충격 고발’ 같은 프로그램에나 어울릴 만한 특별한 모습이지만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천다러가 되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만약 폭력적인 아빠 모습과 아빠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어렵게 지내는 천다러의 모습만 보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아이들은 내 이야기가 아닌, 나와는 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불쌍한 아이의 이야기 정도로만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충격적이긴 하지만 별다른 의미도 없었을 테고 말이다.
비록 백수건달 아빠가 너무나 밉고 창피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아빠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애정을 갖고 있는 천다러의 마음은 보통 아이들이 아빠를 바라보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물론 천다러가 아빠에게 갖고 있는 애정의 이면에는 엄마, 아빠와 함께 있을 때만이 행복한 가정이 유지되고, 자신도 행복할 수 있다는 욕구가 깔려 있다. 더불어 엄마, 아빠가 헤어질 경우 자신과 동생이 아빠에게 맡겨지고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박함도 함께 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이야 가정의 안정을 바라는 아이들의 기본 마음일 것이다. 그래서 비록 백수건달 아빠이긴 하지만 그 아빠가 사라져주기 보다는 ‘좋은 아빠 특효약’이 생겨 아빠가 달라지길 바라는 마음, 그게 바로 천다러의 마음이자 많은 아이들의 바람일 것이다.
무거운 내용이지만 읽으면서 내용만큼 무거움이 느껴지지 않는 것 또한 이 책의 장점이다. 그건 주인공 천다러가 일인칭 시점에서 그때그때 보여주는 아빠에 대한 감정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인칭 서술 방식의 장점은 독자가 화자의 고백을 따라가면서 화자의 처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백수건달인 아빠에 대해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눈여겨 볼 건 천다러가 백수건달 아빠에 대해 강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흔적이다. 그래서 아빠가 도대체 자신과 동생을 사랑하기는 하는 건지 하는 의문을 갖다가도 그건 아빠가 사랑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기 때문이라고 믿어 버리고 만다. 또 어쩌다 아빠의 좋은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아빠에 대한 온갖 원망은 사라지고 아빠와의 좋은 기억만을 간직한다. 아빠랑 추석날 개기월식을 관찰했던 일의 경우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아빠가 항상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추석날 우리에게 개기월식을 관찰해 오라는 숙제를 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아빠는 나와 함께 새벽 다섯 시까지 개기월식을 관찰해 주었다. 게다가 나에게 천구가 달을 삼켰다는 옛날이야기도 해 주었다. 그날 나는 아빠가 너무 좋았다. 나에게도 이렇게 좋은 아빠가 있다는 게 정말 기뻤다. 비록 남들은 우리 아빠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걸 모르겠지만, 별들은 알 것이다. 별들이 증인이니까.”(12쪽)
개기일식을 함께 관찰해준 아빠에 대한 천다러의 사랑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야기 뒤에 가면 확인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개기월식을 함께 관찰해준 뒤에 한바탕 사건이 벌어진다. 아빠는 구름 속에서 복권 숫자를 찾아내느라 정신이 없어졌고, 며칠 뒤 그 번호가 단 하나도 들어맞지 않게 되자 ‘그 놈의 달을 보러 가자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며 그 책임을 천다러에게 몽땅 뒤집어씌운다. 이 일은 동생 유괴 사건으로 이어지고 결국 엄마가 아빠 곁을 떠나게 디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아마도 아빠 곁을 떠난 뒤 쓴 걸로 여겨지는 이야기 첫머리에 나오는 아빠의 소개글에서는 이런 일들은 빠진 채 아빠가 좋았던 추억만을 말하고 있다. 그건 천다러가 아빠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천다러는 아빠를 피해서 엄마랑 집을 떠나는 날, 아빠가 늘 장기를 두던 사당에 가서 신께 부탁을 한다. 이사 가는 집 주소를 알려드릴 테니 아빠가 달라진 모습으로 이곳에 오면 가르쳐주라고 말이다. 아빠가 천다러의 소원처럼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그래서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쩐지 이 책이 암담한 상황에서도 어둡고 답답하지 않고 때론 밝은 빛을 보였던 것처럼 그 희망을 믿고만 싶어진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178호(2006년 6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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