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힘
《바닐라 향기가 나는 편지》(세빔 악 글/신민재 그림/이난아 옮김/푸른숲/2006년)
이 책은 터키 동화다. 그 자체만으로도 특별함이 있다. 외국동화는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영미권을 비롯한 몇 나라의 작품에만 집중되어 있는 안타까운 현실 때문이다. 더구나 터키는 아직까지 거리에서 이야기꾼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이야기 문화가 풍부한 곳이 아닌가.
책을 읽고 나서는 작가 이름을 몇 번이나 입으로 읊조렸다. 세빔 악.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 크이묵의 이야기를 전해주면서도 터키의 옛이야기 한 자락을 깔아두기도 하고, 이야기꾼 나라답게 편지라는 형식을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즐길 수 있게 하는 솜씨가 빼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야기가 주는 교훈도 참으로 의미 깊다. 게다가 교훈은 하나가 아니다. 읽는 사람에 따라 자기에게 맞는 교훈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게끔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세빔 악 덕분에 터키의 다른 이야기들이, 또 세빔 악의 다른 작품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야기 시작에서부터 능청스럽게도 독자가 호기심을 갖게끔 하는 두 가지 정보를 들려준다. 하나는 크이묵이 꼬마 탐정이라는 점이다. “제대로 풀리지 않는 일이 있다면 거기에는 꼭 잘못이 있고, 범인이 있기 마련이다.”라는 크이묵 탐정발명사무실의 문구는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사건을 맡기는 사람은 없다. 아니, 어쩌면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고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바로 두 번째 정보의 출발점이다. 크이묵이 맡은(?) 가장 중요한 일은 밤마다 망원경을 가지고 하늘에 있는 재단사를 찾으러 나가는 일이다. 하늘에 있는 재단사는 하루 24시간을 1분으로 나누어 자른 뒤, 보이지 않는 재봉틀로 꿰매 낮의 몇 분을 밤에 이어 붙인다고 한다. 즉 낮에 밤을 이어붙임으로써 밤이 오게 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크이묵은 9월 말이 되어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자 초조해지고 만다. “낮에서 자른 분들을 자루에 넣고 던져. 밤에 이어 붙이지 말고.”
이런 내용의 진정서를 재단사에게 보낼 방법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할머니랑 단 둘이 사는 크이묵에게 밤이 길어진다는 건 할머니에게 붙잡혀 밤새 견딜 수 없이 지루하게 지내야만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결국 크이묵에게 밤이 길어진다는 건 크이묵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렇게 만드는 범인은 하늘의 재단사인 셈이다.
이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범인을 잡아야 할 차례다. 하늘의 재단사에게 진정서를 보내는 일은 크이묵의 막연한 바람일 뿐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현실에서 직접 부딪치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 일이 풀려나가는 과정이 또한 재밌다. 그 과정 속에도 하늘의 재단서처럼 이야기가 가득하고, 이야기들은 정말로 힘을 발휘한다.
크이묵은 규칙 투성이 할머니에게 벗어나기 위해 일을 시작한다. 다리가 마비된 틀틀 할아버지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이다. 문제는 틀틀 할아버지를 알고 난 뒤로 할머니가 더 싫어졌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어느 날 날아온 편지 한 통으로 단숨에 해결된다. 30년 전 파리에서 보낸 편지로 이미 8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온 것이다. 편지에는 한 편의 동화가 써 있었다. 꿈을 꾸지 못해서 괴로워하던 임금님이 꿈을 찾아 나선 이야기다. 편지를 읽은 크이묵의 “마음속에는 아름다운 감정이, 머릿속에는 궁금증들이 생겨났”다. 크이묵만 그런 게 아니었다. 할머니 역시 달라졌다. 3년 동안이나 꿈을 꾸지 못했던 할머니는 편지를 통해 잃어버렸던 자신의 꿈을 찾은 것이다.
이어서 틀틀 할아버지에게도 편지가 배달된다. 또 얼마 지난 뒤에는 틀틀 할아버지의 아들에게도 편지가 온다. 편지는 모두 오래된 우표가 붙어 있었고, 바닐라 향기가 났고, 한 편의 동화가 써 있었다. 시가 잘 써지질 않아서 고민하던 틀틀 할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자신의 시에서 빠진 게 바로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틀틀 할아버지의 아들 역시 편지를 읽고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게 된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편지는 마치 사람들을 잘 알고 있는 듯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동화를 들려준다. 크이묵은 이 편지를 누가 보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하지만 틀틀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아니, 왜 궁금해야 하지?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해. 누가 보냈는지가 아니라 이 동화가 내 관심을 끄는구나.”
아마도 크이묵의 할머니, 틀틀 할아버지의 아들 역시 틀틀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일 거라 여겨진다. 그들에겐 자신의 문제를 발견하게 해준 동화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꼬마 탐정 크이묵은 편지를 누가 보냈는지 비밀을 밝혀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조사하러 나선다. 과연 편지는 누가 쓴 것일까? 마을 사람들 사정을 고루 다 알고 있는 사람, 바로 우체부 귤레르유즈 아저씨다. 아저씨는 우체부 일을 그만 두고 앞으로 동화를 쓴다고 한다. 우체부 일은 사람들과 세상을 더 잘 알 수 있지만 세상과 사람을 아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힘은 바로 동화 속에 있고 말이다.
동화가 이렇게 세상을 바꿀 수 있을 만한 큰 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그렇다면 동화를 쓰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이 아닐까? 하지만 크이묵 할머니 말을 듣고 나니 그건 아닌 듯싶다.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그 우체부는 영리한 사람이었을 뿐이라고. 자신은 동화를 읽었고 그 속에서 길을 가르쳐주는 빛을 보았고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고. 자신도 우체부가 쓴 동화 정도는 몇 백 개도 쓸 수 있다고 말이다.
조금 과장이란 생각도 들지만 가장 중요한 건 동화를 읽고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는 거라는 할머니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 책에서 어떤 빛을 발견할지 궁금해진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174호(2006년 4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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