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효에게 따뜻한 햇빛 한 줌을
《해야 해야 잠꾸러기 해야》(이연경 글/바람의아이들/2004년/절판)
1.
해마다 한 해가 가면 그 해에 나온 책들을 꼽아보는 버릇이 생겼다. 이 정도면 이번 해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책을 꼽을 수 있을 땐 그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하지만 대표작이라 말할 수는 없어도 새로운 시도와 주제에 대해 새롭게 다가가는 신선한 작품들을 만나는 것 역시 즐거운 일이다. 더구나 그 작가가 신인이라면 더욱더.
지난 2004년 한해는 눈에 띄는 신인 작가를 여럿 만날 있었던 해였다. 창비의 좋은 어린이책 공모에서 수상한 《기찻길 옆동네 1, 2》의 김남중,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을 수상한 《강마을에 한 번 와 볼라요》의 고재은, 《신통방통 왕집중》의 전경남 같이 출판사 문학상 공모에서 수상을 하면서 만나게 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좋은 엄마 학원》(문학동네어린이)의 김녹두, 《해야 해야 잠꾸러기 해야》(바람의아이들)의 이연경 같이 공모를 통해 등단하지는 않았어도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활발한 신인의 활동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들 작가가 다음 번엔 어떤 작품을 가지고 나타날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다.
2.
이들 작품은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담고 있다. 《기찻길 옆동네 1,2》와 《강마을에 한 번 와 볼라요》 같이 특별한 시대와 지역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기도 하고, 《신통방통 왕집중》과 《좋은 엄마 학원》처럼 요즘 아이들의 고된 삶의 모습을 환타지 기법을 통해 유쾌하게 그려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연경의 《해야 해야 잠꾸러기 해야》는 다른 작품과는 조금 다르다. 이 작품은 매 맞는 아이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매 맞는 아이와 때리는 엄마의 상황과 심리를 공간과 상징적인 장치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를 충분히 느끼기 위해서는 다소 신파조로 보이는 앞부분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다. 소녀가 얌전히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그림에 '오늘도 무사히'라고 써 있는 거울 이야기, 주인공 상효와 티격태격할 인물로 설정된 게 뻔한 김보람이 바로 나오고, 피아노 학원에서 '소녀의 기도'를 듣는데 피아노를 치는 게 바로 '재수 없는 김보람'이었고, 한달음에 집에 달려와서는 거울에 끼워진 소녀의 그림을 빼내서 찢는 장면은 다음 이야기로 들어가기 위해 지나치게 이것저것 억지로 끼워 맞추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하루하루를 무사히 지나길 바라는 매 맞는 아이의 상황과 1970-80년대에나 흔히 보던 '오늘도 무사'하기를 비는 기도하는 소녀의 그림, 그리고 피아노곡인 '소녀의 기도'는 딱 맞아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어색하게 다가온다.
3.
이 책의 주인공 상효가 살고 있는 공간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반지하방이다. 반지하방은 상효네 어려운 경제 사정을 보여주는 설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방에 살고 있는 상효의 위축된 심리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으로 외부와 차단된 채 가정 폭력이 일어나는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반지하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반은 1층에 반은 지하에 있는 방이다. 그렇지만 이 방은 말대로 반만 지하에 있기보다는 그저 고개만 땅 위에 나와 있는 꼴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얼굴만 땅 위에 있고 나머지 몸은 모두 지하에 있는 셈이다. (23쪽)
그리고 상효가 처해있는 이런 현실 공간은 바로 이 책의 제목과 연결되면서 책의 주제와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이 방은 햇살이 잘 들지 않아 솔직히 언제쯤이 아침인지 언제쯤이 저녁인지 알 수 없다. 우리 집에서만은 해는 잠꾸러기인 셈이다.(23쪽)
또한 작가는 반지하방 하나 만으로 주인공 상효와 언니 상미의 성격도 또렷이 보여준다. 상효가 감성적이라면 공부 잘 하는 중학생인 상미는 훨씬 논리적이다.
언니 말에 따르면 창문은 두 개의 창살로 되어 있는데 그 창문의 살을 통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했다. 첫 번째 창살까지 들어오면 봄, 두 번째 창살까지 들어오면 여름이라는 등……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한상미 식 계절 구분법이었다. (24쪽)
반지하방에 함께 사는 또 한 명의 가족은 엄마다. 이 작품에서 엄마와 상효의 관계는 가장 기본 축이라 할 수 있다.
어두운 반지하방으로 들어오는 엄마는 나와 언니처럼 나갈 수 없는 동굴 속으로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지하방을 지키고 있는 내가 어쩌면 못생긴 괴물로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엄마는 늘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25쪽)
반지하방은 세 사람 모두에게 마치 동굴처럼 여겨지지만 놓인 처지는 다 다르다. 위축될 대로 위축된 상효는 엄마가 자신을 때리는 것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괴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인 것처럼 여기고 만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공포에 떠는 사람에겐 모든 게 괴물처럼 여겨지는 법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괴물 취급을 받으면 그 사람은 스스로 더욱 위축되며 더욱 괴물이 되어간다. 상효도 그랬다. 괴물 취급을 받으며 계속 매를 맞는 동안 상효는 스스로 자신이 괴물임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동굴에서 나와 햇빛 속에서 그 모습을 제대로 본다면 엄마는 자신이 괴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은 괴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또 상효는 자신이 결코 괴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4.
그렇다. 이 책은 매맞는 아이 상효의 이야기다. 열 한 살 상효는 시도 때도 없이 매질을 하는 엄마 때문에 날마다 '엄마가 오늘은 안 때리기를' 빌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야기의 첫 머리에 나왔던 무릎꿇고 기도하는 소녀의 그림은 바로 상효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무사하기를 빌던 소녀의 그림을 찢은 대가라도 치르듯 상효는 엄마에게 두들겨 맞기 시작한다.
어린이 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어린이 날 아침, 밥상만 차려주고 웃음 한번 지어주지 않고 미용실로 일하러 간 엄마를 보러 간 게 화근이었다. 엄마가 한 여자 아이의 머리를 감기다 실수로 거품이 여자 아이 얼굴 위로 떨어지자 엄마는 환하게 웃으며 수건으로 여자 아이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엄마의 웃음을 본 지 한참 된 상효는 그만 머리를 큰 유리에 '쿵' 찍고 만다. 그리고 머리핀이 유리에 부딪히며 유리에 금이 가고, 미용실 문을 박차고 나온 엄마는 빗자루로 상효의 온 몸을 핥고 지나가듯 매질을 해댔다.
그런데 매를 맞아버릇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매질을 하고 결국 때리는 습관이 대물림된다고 했던가? 아니, 대물림이란 말은 너무 확정적이어서 매 맞는 아이의 처지에서는 어른들이 무심코 내뱉는 이런 말들도 고스란히 상처로 남는 법이다.
상효는 언니를 따라 도서관에서 갔다가 그곳에서 김보람을 만난다. 김보람은 또다시 상효를 놀린다. 그러자 상효는 자신도 모르게 김보람에게 달려가 머리를 잡고 흔들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당한 놀림을 분풀이라도 하듯이 말이다. 놀란 건 김보람뿐이 아니다. 상효 스스로도 놀란다.
나도 모르게 내 발길이 김보람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엄마가 나에게 그랬듯이 나는 김보람의 머리를 잡고 흔들기 시작했다. 나도 놀랐지만 김보람은 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105쪽)
상효와 김보람의 관계, 그리고 김보람의 비웃음이 언니에게까지 미치는 걸 참을 수 없는 상효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이 소동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상효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행동에서 엄마의 모습을 봤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분노를 이렇게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언뜻 엄마의 매질과 닮은 부분도 있고 말이다. 상효는 김보람을 바닥에 쓰러뜨리려고 할 때 언니의 슬픈 눈을 보고 멈추고 만다. 상효를 멈추게 한 건 상효가 믿고 따르는 언니의 슬픈 눈이다. 그렇다면 왜 엄마는 상효가 김보람을 흔들던 손을 멈추듯 상효에 대한 매질을 멈출 수 없었을까? 혹시 엄마에게는 분노와 절망감만 있을 뿐 그 매질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다니던 미용실에 일거리가 없어지면서 미용실에 못 나가게 됐고 매질은 더욱 심해진다. 지난 번 김보람 사건 때문에 틀어진 언니의 연애문제를 해결했다는 기쁨에 집에 뛰어들어온 상효는 다시 엄마에게 두들겨 맞기 시작한다.
엄마는 내 머리를 잡더니 나를 주저앉히고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이 에미하고 같이 죽자 죽어."
엄마는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졌다. 예전보다 훨씬 강하게 엄마의 매질은 계속되었다. 엄마는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벽에 걸린 파리채를 꺼내 들더니 사정없이 나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엄마의 눈에는 예전의 불꽃 같은 화는 보이지 않고 슬픔 같은 것이 비쳤다.(138쪽)
그리고 상효의 친구인 병아리 노랑이가 죽던 날, 상효는 엄마에게 죽도록 매를 맞는다. 노랑이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잡아먹을 대상으로만 여겼던 엄마를 향한 상효의 외침 때문이다.
"그, 그, 그래요. 죽었어요. 엄마가 죽인 거라고요. 나도 노랑이 따라서 죽을 거예요."
순간 엄마는 방문 옆에 있던 빗자루를 들고 와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그래, 죽어라. 죽어. 이 에미보다 그 잘난 병아리 한 마리가 그렇게 중요하더냐."
나는 나도 모르는 말을 엄마에게 마구 터뜨렸다.
"엄마가 싫어.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엄마는 눈을 부라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아빠는 안 그랬는데, 아빠는 안 그랬는데……"
아빠라는 말에 엄마의 눈이 활활 타올랐다.
그러더니 빗자루를 들고 내 온몸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매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다 맞았다.(159-160쪽)
상효를 안아 엄마의 매를 막은 건 옆방의 송 기사 아저씨였다. 만약 그때 아저씨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빠와 함께 살던 단란한 시절엔 한없이 좋았던 엄마는 아빠가 사라지고 난 뒤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분노와 절망을 힘없는 어린 딸에게 매로 퍼붓는 엄마의 모습은 충격이다. 상효는 어떨까? 몸의 고통도 고통이지만 엄마의 말 한 마디, 따스한 미소가 필요한 상효에게 쏟아지는 이 매질이 남길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리고 이쯤해서 작가는 엄마가 상효를 때리는 심리적 이유, 즉 상효를 동굴 속 괴물처럼 여기고 두려움에 떨면서 두들겨 팬 이유를 드러낸다. 이렇게 엄마의 매질 속에 담긴 엄마의 한숨과 절망을 읽으면 엄마 역시 안쓰러워진다. 물론 그렇다고 엄마 편에 설 수 있게 되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엄마가 상효에게 퍼붓는 분노와 두려움에 대한 근원을 이해할 뿐이다. 상효의 입장에서 쓰여진 담담한 글을 따라가다 보면 억울하게 괴물이 되어 매 맞는 입장이 된 상효의 딱한 사정이 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때리는 엄마의 심리를 이해하는 건 중요하다. 매 맞는 아이의 문제는 때리는 어른의 문제와 결국 하나인 셈이다. 그리고 둘의 화해를 위해서도 엄마를 이해하는 것 역시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5.
옆방 아저씨랑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상효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운이었다. 옆방 아저씨는 바로 상효가 찢었던 기도하는 소녀 그림의 주인이다. 아저씨는 어렸을 때 자신도 많이 맞았다며 진심으로 상효를 위로해줬다. 상효에게 아저씨가 없었더라면 상효가 그 숱한 매를 맞고 견뎌낼 수 있었을까 싶을 만큼 아저씨는 상효에게 위안이 되는 사람이었다.
아저씨는 상효의 친구가 되어줄 병아리 노랑이를 선물하기도 하고, 함께 소풍을 가기도 하면서 상효의 피난처가 되어준다. 자신을 지키는 건 바로 자신임을 알려준 것도 아저씨다. 마지막 순간 엄마의 매질로부터 상효를 보호해 준 것도 아저씨다.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인물로 비춰지기도 한다.
하긴 상효 역시도 때때로 비현실적인 인물처럼 보여지곤 한다. 자신은 못났기 때문에 엄마가 자신을 두들겨 패는 건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어린이 날 그토록 두들겨 맞고서도 엄마의 울음 속에서 가슴 밑바닥보다 더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슬픔을 느끼고 어버이날 카네이션과 메니큐어를 선물해주려고 비를 맞고 다니면서까지 빈병을 모으는 모습은 5학년 아이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처럼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인물 설정에도 이 작품은 진실성이 돋보인다. 단란했던 한 집안의 가장이 사라지고 가정이 해체되면서 겪는 어려움을 매 맞는 아이와 때리는 엄마의 모습을 통해 현실감 있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간결하고도 건조한 문체는 매맞는 아이의 현실을 또렷이 보여준다.
마지막 장면, 엄마는 상효와 상미에게 시골 외할머니 댁으로 이사를 가자고 제안을 한다. 이사는 어두운 동굴 같은 반지하방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동굴에서 벗어나 밝은 햇빛 가운데로 나오면 상효는 괴물의 모습이 아니라 상효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괴물 노릇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맞을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이사란 상효에겐 자신을 구원자처럼 지켜주던 아저씨와 헤어짐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건 상효 스스로가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함을 뜻하기도 하고 말이다.
6.
이 책은 작가 이연경의 첫 번째 책이다. 하지만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고 하니 신인 아닌 신인인 셈이다. 어찌됐건 기쁘다. 새로운 작가, 신선한 작품, 그리고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출판사. 모든 게 반갑다.
책을 덮으면 매 맞는 상효와 때리는 엄마의 눈빛이 떠오른다. 반지하방에 누워 창살로 들어오는 햇빛을 세고 있는 상효와 언니 상미의 모습이 떠오른다.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과 이미지를 이처럼 선명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난 이 작가에게 기대를 걸어보고 싶어진다. 때론 너무 딱 들어맞추기 위해 쓰여진 상투적인 비유와 상징, 그리고 비현실적인 모습이 갑갑함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이 갖는 장점을 더 높이 사고 싶다.
이 책이 상효처럼 한줌의 햇빛이 절실한 아이들에게 골고루 햇빛을 나누어줄 수 있는 힘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새로운 작품을 쓰고 있을 작가에게도.
- 이 글은 (사)어린이도서연구회에서 펴내는 월간 《동화읽는어른》 2005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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