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린이책 관련/우리창작

해를 삼킨 아이들

by 오른발왼발 2021. 4. 29.
728x90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아이들에게 바치는 이야기

《해를 삼킨 아이들》(김기정 글/김환영 그림/창비)

 

 

내가 뽑은 2004년 최고의 책이라……. 며칠을 두고 생각해도 2004년 최고의 책을 뽑기가 쉽지 않다. 첫째 이유는 지난 한 해 동안 너무 정신없이 지내느라 책을 여유 있게 읽지 못한 탓일 것이다. 리뷰 분야에 제한이 없다고는 하지만 어린이·청소년 책을 빼고 읽은 책이 별로 없다. 내내 고민하던 책들이 어린이·청소년 책이니 이 가운데 2004년 최고의 책을 뽑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뽑으려 하니 역시 쉽지가 않다. 후보감은 여러 편이 떠오르지만 그 가운데 최고의 책을 뽑으려니 이런저런 점들이 걸리곤 했다. 이미 리뷰가 나간 책도 있고, 작품에 아쉬움이 있기도 했다. 또한 아쉬움은 많지만 그래도 장점을 높이 평가해 주고 싶은 책도 있었다. 결국 이런저런 고민 끝에 《해를 삼킨 아이들》(김기정 글/김환영 그림/창비)를 2004년 최고의 책으로 뽑기로 했다.
이 책은 2004년 끝자락인 12월에 나왔다. 이미 5월에 출간된 《기찻길 옆 동네 1, 2》(김남중 글/창비)와 같이 제8회 '좋은 어린이책' 창작부문 당선작으로 뽑힌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다소 늦은 편이다. 공동수상이라는 점 때문에 두 작품을 견줘보고 싶다는 마음에  오랫동안 기다렸던 책이다.
책을 읽고 나서 참 많은 느낌이 겹쳐왔다.

첫째는 작가가 이렇게 능청스러울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정말 복잡하고도 할 말도 많은 우리 근현대사 백년을 이렇게 능청스럽게 펼쳐놓다니……, 이야기꾼으로써 작가의 면모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야기는 백 년쯤 전 범바우골에 살았던 '애기장수 큰이'로부터 시작한다.

"하늘님의 손자, 단군 할아버지가 아사달과 아리와 흰범이를 낳고, 흰범이가 범눈썹이와 오목눈이와 칡범이를 낳고, 오목눈이가 버들아치와 불끈둥이와 반달이를 낳고, 반달이는……"

그때까지 범바우골에는 족보라는 게 없어서 누구나 이렇게 자신의 내력을 외우고 다녔는데, 큰이는 단군  할아버지의 141대 손쯤 된다고 한다. 대단한 뻥이라 여겨지기도 하지만 한 세대를 30년으로 계산을 해 보니 딱 맞아떨어진다. 능청스럽게 펼쳐놓는 이야기지만 결코 그저 과장되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야기의 진실성을 깨닫게 해 준다.
어느 날 큰이는 엄청나게 큰 산삼을 캐고, 산삼을 임금님께 갖다 드리러 떠난다. 큰이가 임금님이 있는 서울에서 본 것은 노란머리 도깨비와 섬나라 도깨비, 정신없이 달려드는 쇠구렁이, 그리고 힘없이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임금님이다. 큰이가 본 것은 바로 백년 전 우리 역사의 중심인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의 현장에 있는 큰이가 '애기장수'라니 만감이 교차하고 만다. 애기장수는 결국 현실에서 좌절을 하고 마는 인물이 아닌가! 동시에 그 좌절 속에는 미래의 희망 역시 간직하고 있지만 말이다. 결국 작가는 첫 번째 이야기 속에서 우리 역사의 좌절과 그 속에서 희망을 찾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둘째는 한 편의 동화 속에서 이렇게 많은 구비전승의 주인공이 얽히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이 책은 모두 10개의 작은 이야기로 나뉘어 있는데, 그 주인공 이름이 심상치가 않다. 애기장수 큰이, 거지공주, 대장 곰보, 돈도나리, 당금애기와 세쌍둥이, 오돌또기, 바보 허봉달, 깡통로봇 가진이, 뱅덕, 아우라지 까마중. 대개가 우리 옛이야기, 민요, 서사무가 등에서 끄집어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인물들을 끄집어낸 것도 놀랍지만 이들은 모두 각각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끝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 현재의 모습이다.
그래서 마지막 이야기인 '아우라지 까마중'은 더욱 특별하다. 늘 혼자였던 까만 얼굴 곱슬머리의 까마중은 온갖 사람들이 빨간 옷을 입고 서로 부둥켜안고 좋아하는 장면이 펼쳐지는 서울 시청 앞을 찾아가는데, 그 길은 앞서 나온 모든 아이들의 이야기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서울로 갔던 큰이는 범바우골로 돌아가서는 어찌 되었을지, 돈도나리가 태어나고는 여우난골에 별일은 없는지, 오돌또기는 여태 물질을 잘 하고 있는지, 깡통로봇 가진이는 이제 악당들이 누군지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까마중이랑 아버지는 돌고 돌아 어울린다는 아우라지처럼 온갖 사람들과 한데 어울려 덩실덩실 춤추며 노래부르며 부둥켜안는다.

이 책의 앞머리에는 '지난 백 년 동안 이 땅에 산 모든 아이들에게'라는 글이 써 있다. 그러고 보니 근현대사 백 년을 10장면에 담아낸 이 책의 주인공은 모두 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은 모두 자라서 어른이 되고 또 죽기도 했다. 결국 아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우리 모습이 되기도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역사의 현장 속에서 아이들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작가가 바라보는 역사는 평범한 백성들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서울에 갔던 큰이는 힘없는 임금의 모습을 보고 범바우골로 돌아서며 촌장님께 따져볼 결심을 하고, 부모를 잃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오돌또기는 억울하게 죽은 부모의 시체를 보고서야 한번도 펴지 못했던 손가락을 편다. 심술꾸러기 곰보는 아이다운 단순함과 정의로운 마음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고, 가진이는 태권브이가 왜 시민을 죽이는 악당들을 그냥 놔두는지 의문을 갖고 깨달아나간다. 아이들은 힘들게 근현대를 살아야 했던 백성들의 모습이자, 역사에 의문을 갖고 바꿔나가는 희망이기도 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아우라지에서 까마중의 슬픈 노래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수 있는 희망 말이다.

아비와 까마중은
얼마나 안고 했는지
둘 다 가슴에 시퍼런 멍이 들었는데
아픈 줄도 모르고 헤헤거리기만 하더랍니다.
그리 웃는 것은 처음이었답니다.
그리고……
아우라지에서
까마중 노래가 더는 들리지 않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292-293쪽)

- 이 글은 2005년 1월 20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펴내는 격주간지《기획회의》 13호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 13호의 주제는 '내가 뽑은 2004년의 책'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2004년에 나온 책 가운데 추천하고 싶은 책 5권을 소개했지요. 5권은 아래와 같습니다.
   <유진과 유진>(이금이 글/푸른책들)
   <기찻길 옆 동네 1, 2>(김남중 글/창비)
   <넉점 반>(윤석중 글/이영경 그림/창비)
   <보이는 세상 보이지 않는 세상>(이강옥 글/보림)
   <초콜릿 전쟁>(로보트 코마이어 글/비룡소)

728x90
반응형

'어린이책 관련 > 우리창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기 팔지 마세요!  (0) 2021.04.29
신통방통 왕집중  (0) 2021.04.29
해야 해야 잠꾸러기 해야  (0) 2021.04.29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  (0) 2021.04.26
내 친구 고슴도치  (0) 2021.04.2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