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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책 관련/기타

이주홍 연표의 비어있는 기간을 찾아서

by 오른발왼발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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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홍 연표의 비어있는 기간을 찾아서

 

 

1. 다재다능했던 이주홍

이주홍만큼 다재다능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다.
동화와 동시, 그리고 다수의 아동극을 발표한 아동문학가로는 물론이오, 시인이자 소설가로, 또 희곡작가 겸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또한 그는 콩트작가이자, 수필가, 번역가, 평론가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동문학과 성인문학의 다방면을 아우르는 문학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1945년에는 《초등국사》(명문당)를 편찬한 특별한 이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뿐 아니다. 이주홍은 음악과 미술에도 탁월한 소질을 갖고 있었다. 《신소년》과 《별나라》에는 그가 그린 표지와1) 그가 곡을 붙인 노래가2) 여럿 실려 있다.

첨엔 음악가가 될 양으로, 바이올린을 구해 제법 무대에 나가서 연주를 했을만큼 기초 공부를 닦았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동요 작곡만도 적지 않았으니, 일시의 뜬 생각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음엔 미술가가 되려고 그림에 전심했다. 뒤에 잡지를 편집하게 될 때,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서 나 혼자의 힘으로 컷이나 표지 따위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여택에서였다.
그러나 음악에나 미술에다 한평생을 붙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맘에 미흡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주저앉은 것이 문학이었다.3)

그가 음악과 미술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 글로 미루어 보건데 아마 아직 발견되지 않은 다른 작품들도 여럿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이제 그의 이름에 붙는 수식어를 단지 아동문학가, 소설가, 시인으로만 한정할 수 없을 듯싶다. 음악과 미술 영역에서의 활발한 활동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1)  《신소년》1930년 1월 '새날의 기쁨'
    《신소년》1930년 2월 '빛나는 건설'
    《신소년》1930년 3월 '바퀴'
    《신소년》1933년 7월 ‘용궁의 사자’
    《별나라》1933년 12월
    《신소년》1934년 3월
    《별나라》1934년 9월 ‘압흐로 갓’
    《별나라》1935년 1, 2월 합호 ‘새해의 첫소리’
    《별나라》1945년 12월 표지                                            

2)《신소년》1930년 4월 '서울가는 나븨'
   《신소년》1930년 7월 '호박꽃'
   《별나라》1933년 12월 '기관차'
   《별나라》1934년 2월 '톡탁톡탁' 

3) 이주홍, 1986, 《천신과의 약속》, <소년의 꿈>,  거암

 

2. 만화가 이주홍

이주홍은 재주도 많았지만 무척이나 부지런했다. 그는 1928년 5월 《신소년》에 동화 <배암 새끼의 무도>를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4) 해마다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신소년》과 《별나라》를 중심으로 동화와 동시도 다수 발표했지만 시와 소설도 꾸준히 발표했다.
그런데 이주홍 문학관에서 정리한 이주홍 연표를 보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처럼 꾸준한 활동 속에서 갑자기 아무런 활동이 없는 기간이 보였다. 1941년에서 1942년이다. 1934년 첫 아이를 잃고 충격에 빠져있을 때에도, 해방 전후에도, 6.25 전쟁의 와중에도 꾸준한 작품 활동을 했던 걸 생각한다면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흔히 그 까닭을 이 시기에 이주홍이 활동의 장을 한양영화사에 두고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하던 시절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회사의 운영난으로 영화화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이때 쓴 시나리오 가운데 하나인 <동학란>을 희곡 《여명》으로 고쳐 써 가명으로 1943년 매일신보의 현상모집에 응모하여 당선이 됐다고 한다.
연표를 확인해 보니 이주홍이 영화와 본격 인연을 맺은 것은 1939년 잡지『영화 · 연극』을 편집하면서부터다. 시나리오 작품을 처음 발표한 것은 1940년 <전원회상곡>이라는 영화연극이었다. 그리고 1943년에 매일신보에 《여명》이 당선되었고, 이어서 시나리오 <장미의 풍속>이 조선영화주식회사 공모에 당선된다. 1944년에는 시나리오 <춘향>도 조선영화주식회사 공모에 당선된다.
이처럼 이주홍의 영화 관련 작업은 1940년에서 1944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후 이주홍이 발표한 시나리오는 두 편뿐이다. 희곡 작업은 꾸준했지만 시나리오는 1950년에 발표한 <군신 충무공>과 1960년에 동화 《피리 부는 소년》을 시나리오로 《현대문학》판으로 발표한 <피리 부는 소년>이 다다.
그리고 이 시기, 즉 이주홍의 연표에 빠져있던 시기에 이주홍이 시나리오 작업 외에 진짜 집중했던 또 다른 활동이 있었다. 그건 바로 만화와 그림 작업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주홍 스스로 이미 미술에 전심했던 시기가 있었고, 또 그 성과를 《신소년》에 실린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니, 만화를 그렸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이주홍은 다수의 만화를 발표했다.
1935년 1,2월호《별나라》에도 <어둥둥 선생>이란 만화를 그린 걸 확인할 수 있고, 또 1934년과 1936년 《신동아》에 이주홍이 만화를 발표한 기록도 찾을 수 있다.5)
하지만 만화가로서 본격적인 모습은 동아일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자투고의 형식으로 처음 발표했던 건 동아일보 1929년 10월 19일에 실린 만평이다. 이후 10년이 지난 1939년 11월 30일부터 12월 30일까지 총 12편의 만평을 발표한다. 그리고 1940년 1월 1일과 7일에는 4칸짜리 만화 ‘자동 스케트’와 ‘새잡기’도 발표한다.6) 이주홍이 동아일보에 발표한 만평 목록은 아래와 같다.    

1939. 11. 30 문명의 도덕
1939. 12.   4 거리의 비극 이얼골이 이결심
1939. 12.   5. 부호기질
1939. 12.   7. 상인의 논리
1939. 12.   9. 야간불경기의 이유
1939. 12. 11. 신사도 밤이되면
1939. 12. 12. 용도도 가지가지
1939. 12. 16. 특등걸인
1939. 12. 21. 우슴거리의 본부
1939. 12. 22. 스.파 광시대
1939. 12. 27. 걸인의 꿈
1939. 12. 30. 더워서 얼어죽은 소식


이주홍은 동아일보에서 만평과 4칸 만화를 발표하기 이전에 ‘만문만화(漫文漫畵)’도 여럿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만문만화란 1920~30년대 유행한 만화의 한 형태다. 지금의 눈으로 본다면 삽화의 비중이 다소 높은 글 정도로 보이지만, 우리나라 만화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아쉽게도 동아일보에서 이주홍의 만문만화를 찾지는 못했지만 이주홍의 만문만화에 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諷刺가 없는사람”, “餘裕가없는 생활” | 이것은 우리가 다같이自認)하는바이다. 이에 나타난 漫畵家 李周洪氏의 諷刺잇고 餘裕잇는 漫文漫畵다. 題하야“여름밤의 꿈!” 或은 해변에누어서 혹은 원두막에 앉어서 날버레 덤비는 무더운 여름밤의 銷夏讀物로特특히 이 一文을 추천한다.(동아일보 1936. 6. 18.)

이것은 李周洪氏의 漫文漫畵다. 李周洪氏는 일즉이 漫文漫畵로 그의 筆致와 筆法의 妙味에 對하야는 이미 讀者의 正評이 잇는지라 다시 군말이 心要치 안커니와 이번 이 文壇大運動會는 現文壇諸氏를 총망라한 漫文漫畵界의 유일한 傑作品인 것을 미리 말한다.
이運動會의 運動場構造는 첫재어떠케 되엇으며 過動種目과 競技者들은 어떠한 人物들인가?
럭비,盲人競走,二人三脚,障礙物競走,씨름,投影競技,공담기,釣影競技,來賓競走等 趣味津津한 種目中에 朝鮮이 가진 文人들은 總登場을 하엿다. 特히女流文人들의 공담기 競技에서는 무엇을뵈엇는가?
이것은 漫文속에 現文人들의 嚴格한 傾向을 運엿으며 漫畵속에 그들의 眞正한 心境을 그린 것이다. 누구나 한번보아 現文壇의動向을 이해할수 잇게된것이 이漫文漫畵다.(동아일보 1936. 8. 24.)

4) 이주홍의 작품이 처음 발표된 것은 1924년 3월《신소년》 독자문단에 동생 ‘이성홍’ 이름으로 발표된 동시 <잠자는 동생>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본격 작품 활동의 시작으로 보기는 어렵다.

5) 한국미술 100년 1(한길사)

6)  이건 어디까지는 개인적으로 찾은 자료에 한정된 것이다. 이 외에 더 많은 작품이 있을 수도 있다.

 

3. 이주홍의 연표 속 비어있는 시간을 찾다

이렇듯 이주홍은 동아일보에서 만화가로서 다양한 실험을 하며 성장을 했다.
이후 이주홍은 이렇게 갈고 닦은 만화가의 역량을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지인 《半島の光》에서 발휘한다.
이주홍은 《半島の光》에서 지금까지와는 차별된 본격 만화를 선보이고 있다. 이제까지 만화가 만문만화, 만평, 4칸 만화였다면 《半島の光》에 연재한 ‘즐거운 박첨지’는 15칸 만화이고, ‘명랑한 김산 일가’는 10칸 만화, ‘버리지 못할 전통/버려야할 습속’은 각각 4컷으로 이루어진 만평의 형태이고, 그 외에 6칸 만화나 기존의 만문만화와 함께 삽화도 선보이고 있다.
이주홍이 《半島の光》에서 만화가로만 활동한 것은 아니지만, 주 활동은 만화였다. 현재까지 찾은 《半島の光》에서 실린 이주홍은 만화는 아래와 같다.

 

1941년 4월호    17쪽 즐거운 박첨지
1941년 5월호    23쪽 즐거운 박첨지
1941년 6월호    33쪽 즐거운 박첨지
1941년 7월호      3쪽 즐거운 박첨지
1941년 8월호      7쪽 즐거운 박첨지
1942년 1월호    32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2월호    28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3월호    28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4월호    30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6월호    24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7월호    26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8월호    22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9월호    16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10월호   16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11월호   24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2년 12월호   12쪽 명랑한 김산일가
1943년 3월호    35쪽/40쪽 버리지못할 전통/버려야할 습속
1943년 4월호    17쪽/42쪽 버리지못할 전통/버려야할 습속
1943년 6월호    21쪽 고쳐야 할 습속. 버리지 말아야 할 전통
1943년 7월호    30쪽 시험적발(만문만화)
1943년 11월호   34쪽  적성추방(만문만화)
1943년 11월호   35쪽  괴물퇴치(6칸 만화)
1944년 1월호    34쪽  적의 흑심 폭로전(만문만화)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 이주홍이 《半島の光》에서 활동하던 이 시기는 기존의 이주홍 연표에서는 보이지 않는 기간이라는 점이다. 이주홍 문학관이 밝히고 있는 연표에서도, 《이주홍의 일제강점기 문학 연구》(류종렬 편저/국학자료원)에서도, 《이주홍과 근대문학》(류종렬 저/PUFS)에서도 1941년, 1942년의 활동은 빠져있다. 이렇게 볼 때 《半島の光》에 실린 이주홍의 만화들은 사실상 숨겨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일까? 과연 지금껏 이주홍의 《半島の光》 활동을 모르고 있었던 걸까? 아마도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이미 만화가 이주홍의 모습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또 한 두 번이 아닌 몇 년간 계속된 이주홍의 만화 이력을 이주홍의 가족들이 전혀 몰랐을 리도 없다. 더구나 이주홍이 연표에 빠져 있는 1941년과 1942년을 제외하곤 해마다 왕성한 활동을 해 온 걸 감안할 때, 연표에 빠진 시기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혹시 이 시기의 활동을 굳이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물론 지금껏 연표는 만화를 제외한 문학 중심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수 있다. 수많은 만화를 발표했지만, 그 만화가 책으로 엮어져 나온 적도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주홍의 삶에서 분명 만화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이주홍의 삶과 문학을 이야기할 때도 반드시 필요함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4. 만화 - 이주홍의 감춰졌던 친일의 흔적

《半島の光》에 실린 이주홍의 만화는 이주홍의 역량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하지만 이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충격적인 부분이 있으니, 그건 바로 이주홍 만화 속에 깃든 친일의 모습이다. 동아일보에 실린 만화들이 사람들의 일상 모습에 중점을 두었다면 《半島の光》에서는 친일의 모습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건 그의 아동문학 작품들이 갖고 있는 웃음과 해학이 만화 속에도 그대로 드러나 친일 작품이라는 점이 분명함에도 마치 당시의 소소하고 재미난 일상의 풍경을 보는 듯 한 느낌을 자아낸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냥 일상에 묻혀 지내며 자연스럽게 보고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다.  
‘즐거운 박 첨지’의 경우 모범촌 반장 박 첨지가 동네를 이끌어나가며 뺀질거리는 허 별감을 설득하는 형식으로, 박 첨지와 허 별감의 대비되는 캐릭터가 작품을 맛깔나게 끌고나간다. 그런데 가만 보면 모범촌 반장 박 첨지가 마을 사람들을 독려해 하는 일이란 일제가 벌이는 사업에 앞장서는 일이다.  


1941년 4월 ‘즐거운 박첨지


‘명랑한 김산 일가’의 김산 역시 ‘즐거운 박첨지’의 박 첨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즐거운 박 첨지’에 비해 주제가 아주 노골적이다.

1942년 3월 ‘명랑한 김산 일가

 

이쯤 되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이 이주홍의 적극적인 친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주홍의 연표에서 빈 기간은 이를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그런데 앞서도 잠깐 짚었지만 이주홍이 《半島の光》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이주홍이 시나리와 작업에 몰두하던 시기에 통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주홍은 1939년 잡지『영화 · 연극』을 편집하면서 영화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다소 의외성이 있긴 하지만 이주홍이 편집자로서도 활발히 활동을 했었고, 《신소년》을 통해 여러 편의 아동극을7) 선보였던 점을 생각한다면 잡지 편집을 하면서 시나리오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과정은 아주 자연스러웠으리라 여겨진다.
이주홍은 34,5세 때 윤봉춘이 관계하던 한양영화사에 적을 두고 시나리오를 집필8)했었다고 하는데, 이 시기 역시 1939년과 1940년으로 이주홍이 영화에 인연을 맺은 시기와 일치한다.
배우 겸 감독인 윤봉춘은 한국 영화의 개척자 가운데 한 명으로 영화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그가 존경을 받는 데에는 분명한 까닭이 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조선영화령을 공포하여 조선영화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이어 1942년에는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를 세워 영화인들을 군국주의 선전영화 제작에 본격 동원했다. 윤봉춘은 이를 거부하며 영화판을 떠나 경기도 양주군으로 낙향해 산곡학원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그가 다시 영화판으로 돌아온 건 해방 후였다.
이처럼 이주홍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기는 한국영화의 암흑기였다. 윤봉춘 같은 일부 지조 있는 영화인들은 영화계를 떠나 은신을 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주홍은 윤봉춘과 달랐다. 한국영화의 암흑기에 본격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그가 공모를 통해 당선된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고,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영화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특수법인이다. 물론 이주홍이 영화계에 처음 발을 디딜 때부터 친일을 시작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윤봉춘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영화계 입문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이주홍이 《半島の光》을 통해 친일 작품들을 발표한 건 너무 당연해 보인다. 《半島の光》은 조선금융조합연합회의 기관지다. 그리고 조선금융조합연합회는 일본이 조선에서 신용 기구를 통한 착취를 강화하기 위해 만든 식산은행의 주요 자금원이었다. 같은 시기 이주홍이 활동했던 영화계의 성격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주홍 문학관의 연표에 따르면 1943년과 1944년에 《東洋之光》에 일문 단편소설 <내 산아>와 <지옥안내>, 시 <전원에서>를 발표한 것으로 되어있다. 약칭 ‘동광’으로도 불렸던 《東洋之光》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발행된 월간지다. 일제에 의해 발행된 잡지가 아니라 3.1 운동 당시 33인의 한 명이었던 박희도가 변절을 하면서 만든 잡지로,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일본어로 발행되었다. 이 작품들을 직접 확인해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잡지의 성격을 볼 때 겉으로 드러난 작품의 친일성과는 상관없이 이주홍의 친일 성향을 보여준다. 또 연표에는 빠져있지만 이미 1942년 2월 《東洋之光》에 발표한 <반곡선생과 그의 제자들>, 1943년 7월 발표한 <청년과 도의> 역시 친일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고 보면 이주홍은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적극적으로 친일 작품을 발표하며 활동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7) 1930년 1월 뱀 사람. 말 사람
    1930년 2월 토끼 눈알
    1930년 3월 팥밭
    1930년 4월 젊은 통장사
    1930년 8월 도화시간
    1934년 3월 야학가극 개떡
    1934년 4월 낙동강 봄빛

8) 신동한,《신화》, 범우사, <이주홍 론>, 1977년


5. 해방 후의 변신

이주홍은 해방 이후 친일의 흔적을 지우고 새로운 면모를 보이며 다시 활발한 활동을 한다.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의 중앙집행위원과 아동문학부위원, 조선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의 위원장과 중앙협의원과 조직부원,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의 미술부문 상임위원과 중앙위원, 조선문학가동맹의 아동문학위원회 위원과 서기국 출판부원,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시 지부 집행위원 등을 맡았다. 마치 1930년대 카프 시대의 이주홍의 활동을 보는 듯 하다. 일제 말기에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던 이주홍이 이처럼 변신을 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1945년에 일제에 피검된 사건 덕분이 아닐까 여겨진다. 이주홍은 1945년 봄에 피검되었다가 8. 15 해방 다음 날인 8월 16일에 출감을 한다. 이 일은 마치 이주홍이 일제에 저항을 한 흔적처럼 느껴진다. 이주홍은 마치 주인공이 이주홍 자신을 연상케 하는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72년 발표한 단편소설 <음구>와 1973년 발표한 단편소설 <신화>가 그렇다. 모두 문인인 주인공이 1945년 봄에 피검되고 만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시기까지도 친일 활동을 하던 이주홍이 갑자기 피검됐다는 건 다소 의외다. 겉으로 드러난 활동 외에 무언가 더 있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혹시 해방 이후 다시 적극적인 프롤레타리아 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주홍의 피검은 큰 의미를 둘만한 사건은 아닌 것 같다. 그 답의 열쇠를 한 신문의 칼럼에서 찾을 수 있었다.
2009년 12월 1일 동아일보 ‘최정호 칼럼’이었다.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불만으로 쓴 글이지만 의미심장한 부분이 보였다.

“1944년 들어 싸움터가 점점 일본 본토로 다가오자 일본은 미국의 일본 및 한국 상륙에 대비, 우리나라 지식인을 전부 학살하려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해방 전 우리 집에 와 내 이력을 조사해간 고야마라는 한국인 형사를 만났더니 ‘일본은 우리나라 지식인을 전부 죽이기 위해 북악산 밑에 큰 구덩이를 파고 리스트도 작성했는데 나도 들어 있었다’”던가.

여기서 증언을 하는 사람은 언론인 유광렬이다. 유광렬은 항일 운동을 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언론계의 대표적인 친일 논객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조선임전보국단과 조선언론보국회에 가담하였고, 중일 전쟁 때 중국전선에도 종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그가 이런 증언을 했다. 즉, 당시의 피검은 일제에 저항하는 세력을 막기 위한 피검이 아니라, 패망의 조짐이 다가옴에 따라 불안해진 일본이 문제를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무작위로 지식인들을 잡아넣으려 했던 것 정도로 생각하면 충분할 듯하다. 즉, 당시 이주홍이 피검됐다는 것이 일제에 저항한 흔적으로 볼 만한 건 전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해방 초, 이주홍이 활동을 재개하는 데에는 분명 도움을 주었으리라 여겨진다. 당시는 사람도 물자도 다 부족하던 시기였고, 그래도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설득해서 다시 일하는 게 자연스러웠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유광렬이 증언한 리스트는 비밀문서였기에 해방 후에도 풍문으로만 잠시 떠돌았을 뿐 그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9) 최정호 칼럼, ‘과거사 바로 세우기’를 바로 세우기


6. 인간 이주홍 제대로 보기

친일 논쟁은 나로서는 늘 부담스럽다.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친일을 하지 않고 잘 살아낼 수 있었을까’라는 부분에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친일을 했어도, 다른 많은 친일 인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조건 감추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감춘다고 해서 ‘나의 역사’가 사라지는 게 아니란 건 안다.
이원수의 친일 논쟁 때도 그랬지만, 이주홍을 보면서도 안타까움이 앞선다. 이주홍이 적극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든 것이 혹시 그 어떤 분야보다도 높은 친일 인사로 가득 차 있던 영화 쪽 일과 관련이 있을까 싶어질 땐 그의 차고 넘치던 재능이 오히려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작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그건 단순히 그 사람의 문학 작품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주홍처럼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활동했다면 그 사람의 다양한 활동 분야 전체에 대한 조망 또한 필요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동문학에만 관심을 갖는다면 이주홍의 친일 활동은 눈에 들어오기 어렵고, 결국 이주홍의 삶과 문학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이주홍이 이원수보다 훨씬 더 많은 친일 만화를 발표했지만, 만화가 아동문학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지금껏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이 글이 그동안 아동문학을 중심으로만 이야기되던 작가 이주홍에 대한 논의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주홍의 친일 활동에 대한 인정이 이주홍이 이룩해 놓은 아동문학의 수많은 성과에 대한 무조건적인 폄하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글은 월간 《어린이와 문학》(2011년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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