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동화, 새로운 시대의 요구
1.
1997년. 창비에서 이상권의 동화집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가 나왔다.(현재는 웅진주니어에서 재출간) 이 책은 나오자마자 논란에 휩싸였다. 어찌 보면 그 이유는 단순했다. 표지에는 보통 동화집과는 달리 ‘이상권 생태동화집’이라 쓰여 있었다.
나 자신도 이 이전엔 생태동화라는 말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태동화’라는 것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동화면 동화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생태동화라고 한 건 상업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정말 좋은 작품이라면 작품 속에서 생물의 생태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텐데 생태동화라는 말 자체를 붙일 필요가 없다는 의견 등 이 책을 둘러싼 논란이 분분했다. 책의 내용은 논란의 중심에서 오히려 한 발 비껴서 있었다.
논란의 중심에 있던 이상권은 다시 얼마 뒤 또 한 권의 생태동화집 『풀꽃 친구가 되었어요』(창비, 1998)을 출간한다.(현재는 현암사에서 재출간) 이상권이 어린이 책 작가로서, 생태동화 작가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분명 생태동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생태동화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활동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듯 생태동화 역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점에서 이상권은 첫 번째 생태동화 작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과연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 이전엔 생태동화가 과연 없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생태동화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 듯싶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생태란 ‘생물이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지만 왠지 생태동화를 설명하기엔 만족스럽지 않다.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동화 형식을 빌어 생물의 생태를 알려주고 있는 많은 지식책들이 모두 생태동화의 틀에 들어가고 만다. 실재로 이런 지식책 가운데 많은 수가 생태동화라 이름 붙여 나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은 어디까지나 지식 전달을 목적으로 한 책이지 생태동화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작품을 생태동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자리에서 ‘생태동화란 무엇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아직까지는 생태동화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생태동화가 아직까지는 주류에서 벗어나 있고, 한편으론 아직까지 생태동화가 갖고 있는 편견을 벗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다루는 작품과 생태동화에 대한 정의는 다분히 개인적인 의견일 수밖에 없다.
나는 생태동화란 한 생물의 살아가는 모습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한 생물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생물들과의 관계가 그려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모습이 드러나야 한다. 그 관계가 때로는 친근한 관계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먹고 먹히는 관계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사람이 일방으로 개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사람들 역시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 이전에도 생태동화로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이 분명 있음을 안다. 1967년 발표된 권정생의 「강아지 똥」이 그 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강아지 똥이 민들레꽃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순환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강아지 똥」을 생태동화로 분류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생태동화의 틀에서 볼 때 「강아지 똥」은 분명 생태주의 정신이 잘 드러난 생태동화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보통 생태동화라 할 때는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 이후에 나온 작품들을 생각한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강아지 똥」이 나올 무렵은 생태 문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기가 아니었다.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가 나온 1990년대는 달랐다. 사람 중심의 개발이 낳은 생태계의 위기와 환경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면서 생태문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던 때였다.
서양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생태와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이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되면서 문학생태학이란 말이 등장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는 생태문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1970-80년대는 여전히 개발과 독재가 중심 과제였다. 그러다 1990년대에 이르면서 비로소 생태문제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생태동화란 생태문제의 대두라는 사회적 흐름 속에서 나온 동화의 한 경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상권의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가 생태동화의 효시처럼 여겨진 데는 까닭이 있었다. 만약 이 책이 10년만 먼저 나왔다면 생태동화집이라 이름 붙여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2.
생태동화에 대한 관심은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로부터 촉발됐다. 그리고 이후 ‘생태동화’란 타이틀을 내걸고 나오는 책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생태동화란 생태동화를 표방하고 나왔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생태주의 정신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야말로 좋은 생태동화라는 관점에서 생태동화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사람과 동물의 공존 - 이상권 작품 세계
이상권은 대표적인 생태동화 작가답게 생태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생태동화집으로 나온 책은 물론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작품 속에서 생태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그 녀석 왕집게』(웅진주니어, 2004)와 『멧돼지가 기른 감나무』(사계절, 2007년)는 『하늘로 날아간 집오리』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동물 이야기다. 이상권 작품 속에서 동물들은 사람들과 늘 부대끼면서 살아간다. 사람도 생태계의 일부이기에 때문이다. 그래서 집짐승들은 사람과 교감을 나누며 애틋한 정을 주고받지만 결국엔 사람에게 잡아먹힐 운명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한다. 솔개가 뱀을 잡아먹고,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고, 개구리가 벌레를 잡아먹듯이 사람이 집짐승을 잡아먹는 건 자연스럽다. 때론 사람들은 제 욕심에, 자기 감정 때문에 동물들을 잔인하게 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작품을 읽다 보면 그런 행동을 한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이해하게 된다.
장편동화 『우리 동네 올챙이 연못』(사계절, 2009)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저마다 상처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 상처를 극복하는 내용이다. 그들이 마음을 치유하고 성장해나갈 수 있었던 건 자연 덕분이다. 거창한 자연이 아니라 주말농장이 있는 작은 뒷산이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주 작은 물만 있어도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올챙이를 본다. 그 올챙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힘을 모아 작은 미나리꽝을 만들어 올챙이를 키운다. 이 책에서 올챙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건 돌미나리를 키우는 할머니다. 할머니는 잔인할 정도로 사람들이 올챙이를 위해 막아놓은 물꼬를 트곤 한다. 하지만 돌미나리를 키워 손주들과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할머니 사정을 알고 나면 잔인하다는 마음은 사라진다. 올챙이의 생존을 위해 물꼬를 막는 일이 할머니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일인 것이다.
이처럼 이상권의 작품에는 늘 사람과 동물이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대낀다. 하지만 결국엔 서로가 함께 살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다.
2) 사람과 동물, 멀고 먼 화해의 길 - 김우경 작품 세계
김우경은 딱히 생태동화 작가로 알려지진 않았다. 발표한 작품 수도 많지 않지만 그의 작품에 특별히 생태동화란 이름이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우경의 작품 바닥엔 늘 생태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김우경의 생태에 대한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은 그의 첫 번째 작품인 『머피와 두칠이』(지식산업사, 1996)다. 머피와 두칠이는 모두 사람이 기르는 개다. 차이가 있다면 머피는 사람들에게 길들여 있는 부잣집 애완견이고, 두칠이는 평범한 개다. 하지만 자신이 주인의 보신용으로 잡힐 것이란 걸 알게 되자 두칠이는 자신의 삶이 사람들 손에 좌지우지될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결국 두칠이는 사람들 손을 떠나 숲에서 자유로운 개로 살기로 마음 먹는다.
두칠이가 이런 결심을 하기까지는 우연히 만났던 고양이 가을수수깡의 영향이 크다. 가을수수깡은 ‘내 주인은 바로 나 자신’이지 결코 사람이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처음엔 집고양이였지만 기꺼이 산고양이가 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두칠이 역시 처음부터 원했기 때문은 아니지만 사람들 손을 떠나 숲으로 간다.
이상권의 작품에서라면 함께 어우러져 살아야 할 대상이지만 김우경 작품 속에서는 집에서 키우는 동물이라도 결코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건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기 위해서 사람의 손을 떠나 독립을 해야 한다. 이처럼 김우경 작품은 늘 동물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 된다.
『풀빛 일기』(지식산업사, 1998년/절판)도 마찬가지다. 숲에서 살던 꿩 풀빛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숲에 사는 동물들을 위협하는 건 사냥꾼이다. 풀빛은 사냥꾼에게 잡혀와 우리에 갇히고 만다. 자폐증세가 있는 사냥꾼의 아들 찬수는 풀빛을 돌보며 조금씩 좋아진다. 어쩌면 여기서는 사람과 화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풀빛이 우리에서 벗어나 숲으로 갈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따로 있다. 사냥꾼이 사냥 도중 벼랑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사냥을 그만 두었기 때문이다. 결국 동물들의 자유와 평화는 사냥꾼이 벌을 받듯 크게 다치고 사냥을 그만두어야만 올 수 있는 것 같다.
『수일이와 수일이』(우리교육, 2001)은 이야기 구조만 보자면 생태동화와는 거리가 멀다. 마음껏 놀고 싶은 마음에 쥐가 사람으로 변하는 옛날이야기를 떠올려 또 하나의 수일이를 만들어 내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그런데 가짜 수일이는 점점 진짜 행세를 하기 시작하고, 수일이는 가짜를 몰아내기 위해서 고양이를 가져가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수일이가 가져간 고양이는 사람에게 길들여진 고양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수일이는 가짜를 몰아내기 위해서 고양이 방울이와 함께 간다. 방울이는 처음엔 길들여진 고양이었지만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을 찾아 스스로 들고양이가 된 고양이다.
이처럼 김우경 작품에서 동물들은 사람들에게 길들여지는 걸 거부하고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나간다. 이는 어쩔 수 없이 사람과 어느 정도 대립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다.
3) 애완동물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 박기범 작품 세계
개는 사람들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다. 지금은 마당에 풀어 놓고 키우는 개는 거의 없다. 개들은 사람들이 사는 집안 깊은 곳까지 들어왔다. 개를 키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개의 엄마라 칭하며 아이를 돌보듯 개를 돌본다. 개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위안을 주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런데 개의 입장은 어떨까? 과연 개들도 사람들과 살면서 위안을 받고 행복해할까? 개를 주인공으로 개의 입장에서 쓴 이야기들은 많다. 하지만 박기범의 작품은 똑같이 개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쓴 작품이면서도 그 울림이 다르다.
2003년 박기범은 두 편의 작품을 함께 선 보인다. 『새끼 개』(낮은산/절판)와 『어미 개』(낮은산)다. 두 작품은 개와 사람과의 소통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새끼 개』를 보면 아이들이 귀여워 이렇게 저렇게 데리고 노는 일이 아이들에게는 즐거운 일이지만 새끼 개에겐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일인지를 느끼게 한다.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작게 짖어 보지만 아이들은 새끼 개가 좋아서 그런 걸로 받아들일 뿐이다. 이렇듯 소통이 안 되는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 개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조금씩 사나워지고,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기분을 맞춰주지 않는 개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결국 새끼 개는 되팔려 와서 개장 안에 갇힌다. 좁고 갑갑한 개장이 답답한 새끼 개는 기회를 틈타 그곳을 탈출한다. 하지만 집안에서만 자란 새끼 개에게 현실은 만만치 않다. 결국 차에 치어 죽고 만다.
굉장히 불편해진다. 사람과 개 사이의 돈독한 관계에 대한 믿음이 깨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새끼 개를 대하는 아이들의 태도가 현실의 우리와 똑같기 때문에 개에 대한 죄책감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어미 개』는 『새끼 개』에서 느끼는 이런 불편한 마음을 풀어준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어미 개 '감자'는 폐휴지를 팔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할머니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어미 개 감자와 할머니는 서로 신뢰를 하고 있다. 비록 감자가 철마다 낳은 새끼를 할머니는 그대로 개장수에게 넘기고, 그 때마다 감자는 죽을 듯한 슬픔에 빠지게 되지만 그렇다고 그 신뢰가 깨지지는 않는다. 좁은 할머니 집에서 감자의 새끼들이 다 살 수도 없고, 감자가 새끼를 안 갖는 것도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다. 더 좋은 곳에 가서 잘 살기를 바라며 떠나보내야 하는 게 현실이다. 할머니도 새끼를 보내는 감자의 마음을 안다. 할머니 역시도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혼인을 하고 나서는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 남편 때문에 자식들하고도 다 떨어져 살았기 때문이다.
『미친 개』(낮은산, 2008년)는『새끼 개』와 『어미 개』에 이은 작품이다. 사람들에게 버려진 개 한 마리가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쓰레기통을 뒤지면 여기저기 떠돌다 외딴 시골 마을까지 흘러들어온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사흘 밤낮으로 쏟아지는 걸 보며 개는 두려웠던 옛일을 떠올리고 하늘에 대고 울음을 토해낸다. 이후 개는 마을에서 미친 개 취급을 당한다. 결국 자신을 겨누는 총과 마주하고 만다. 그러나 개는 사람보다 빨랐고, 사람은 개한테 깔린다. 개는 사람을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개는 발을 떼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고, 그 사람은 넋 나간 얼굴로 도망쳐 내려갔다.
개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억측으로 미친 개로 내몰리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는다. 사람들이야 금방 잊어버리고 말 일일지 몰라도 개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새끼 개』『어미 개』『미친 개』는 모두 사람과 개가 만나서 겪는 이야기다. 하지만 상황은 모두 다르다. 박기범은 낮지만 강한 어조로 사람과 개의 소통과 관계는 어떠해야하는지를 우리에게 생각하도록 한다.
4) 자연과 사람 경계에서 삶을 찾다 - 황선미 작품 세계
황선미 작품은 크게 두 가지 축이 있다. 하나는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자연에 대한 이야기다. 『샘마을 몽당깨비』(창비, 1999)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 2000) 『과수원을 점령하라』(사계절, 2003)는 황선미의 자연에 대한 생각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모두 자연과 사람이 만든 환경을 서로 대비해 보여준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경계에서 자신의 새로운 삶을 찾아간다.
『샘마을 몽당깨비』의 배경은 번잡한 도시 한복판에 폐가로 남아있는 오래된 기와집이다. 버들이를 짝사랑한 몽당깨비는 모든 생물들이 먹던 샘물을 기와집으로 끌어온다. 몽당깨비는 그 벌로 1000년 동안 은행나무 뿌리에 갇히는 벌을 받는다. 결국 기와집은 파괴된 자연의 상징인 셈이다. 하지만 몽당깨비는 300년이 지난 뒤 은행나무가 뿌리째 뽑히면서 깨어난다. 기와집은 헐릴 위기에 처한다. 몽당깨비는 보육원에서 동생과 나와 숨어살던 아름이와 함께 은행나무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몽당깨비는 기와집도 자연의 상태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기꺼이 다시 벌을 받으러 은행나무 뿌리로 들어간다. 자신의 의지로 은행나무 뿌리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니 돌아가지 않아도 될 법도 하건만 굳이 다시 벌을 받기 위해 들어가는 몽당깨비의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난용종 암탉 잎싹이 직접 알을 낳고 품어보겠다는 희망을 갖는데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처음엔 양계장 밖의 마당을 꿈꿨던 잎싹은 마당에서는 그 희망을 찾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당 밖으로, 저수지로 나가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마당 밖의 세계는 자연이다. 자연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곳보다는 위험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에 갇혀 지내는 것보다는 훨씬 자유로운, 진짜 살아있는 삶임을 깨닫는다.
『과수원을 점령하라』는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시 가운데 남아있는 과수원과 이를 차지하려는 여러 생물들의 이야기다. 아파트가 상징하는 근대의 틈바구니에서 동물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잊고 산다. 동물들이 과수원에 찾아드는 모습은 때론 삭막하기도 하지만 떠들법석하고 활기차서 생명의 기운이 넘친다. 여기에 생명을 사랑하는 과수원 할머니가 어우러지면서 과수원은 여러 생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건강한 공간이 된다.
이처럼 황선미 작품에서 주인공들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공간을 탈출해 자연으로 나온다. 『샘마을 몽당깨비』에서 파괴되었던 기와집은 다시 본래 자연의 모습을 되찾고,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사람들을 위해서만 알을 낳아야 했던 잎싹은 암탉의 정체성을 찾아 위험한 공간인 마당 밖의 자연으로 나온다. 『과수원을 점령하라』에서 과수원은 생명이 없는 도시 한가운데 남아있는 자연이요, 쉼터다. 그래서 모두들 과수원을 차지하기 위해 이곳으로 몰려온다.
황선미는 이처럼 인위적인 공간과 자연의 대비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야 할 공간은 자연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5) 그 밖의 작품들
생태동화는 어쩔 수 없이 사람만을 위해서 개발되는 근대에 반하는 논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근대의 논리는 다른 생물들과 함께 살아가는 공생의 관계가 아니다. 모든 생물들은 사람을 위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잘못된 모습의 미래를 보여주는 작품들이 있다. 안미란의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창비, 2001)에서 식물은 씨앗을 맺지 않는다. 씨앗을 독점해 공급하는 회사가 씨앗을 맺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이익 때문에 자연은 본 모습을 잃고 만다.
조성은의 『미래의 소년 미르』(비룡소, 2006)에는 두 가지 세계가 있다. 하나는 주인공인 미르가 살고 있는 ‘다시 태어난 숲’이다. 이곳은 사람들의 잘못으로 파괴되었던 곳이다. 사람들은 완전히 파괴된 이곳을 버리고 거대한 알 모양의 세상을 만들어 그곳에서 산다. 그곳은 낮과 밤도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내는, 완벽하게 통제되는 거대한 세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 속 세상으로 떠난 뒤 완전히 파괴되었던 바깥 세상은 스스로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다시 태어난 숲’은 이렇게 태어났다. 미르는 두 세계를 넘나들며 알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이들 작품은 미래 세계를 바탕으로 한다. 미래 세계에서 사람들은 과학의 힘으로 식물이 씨앗을 맺는 것이나 낮과 밤까지 자연을 통제하지만 그런 미래의 모습이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의 미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3.
지금까지 1997년 이후 나온 생태동화 경향의 작품들을 살펴봤다. 작가가 생태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같은 생태동화라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환경 문제나 유전자 조작의 문제 등도 생태동화의 틀에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생태에 대한 관심이 커질수록 생태란 말이 왜곡될 여지도 커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4대강 정비 사업을 한다는 정부나 이를 반대하는 쪽이나 모두 생태 이야기를 한다. 양 쪽이 말하는 생태는 말은 같지만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처음 생태동화란 말이 나왔을 때 상업성에 대한 의도를 의심받았던 것처럼 요즘은 생태, 환경 문제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그 의도를 의심해 봐야 할 상황이다.
결국은 앞으로 생태동화가 해야 할 몫이 더 커졌음을 뜻할 것이다.
『어린이책이야기 2010 . 봄. 09』에 실린 글입니다.
'자연을 품은 아동문학'이란 기획으로 제 글을 포함해 모두 세 편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1. 생태학적 상상력과 생태동시의 양상 / 양수대
2. 생태동화, 새로운 시대의 요구 / 오진원
3. 한국 전통 자연철학과 한강 웅어 이야기 / 이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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