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5. 12.
완역 세계 명작과 출판 현실
어른들에게 ‘세계 명작’에 대한 기억은 남다르다. 책이 귀했던 그 시절, 세계명작 전집들을 읽으며 울고 웃고 상상의 나래를 폈던 기억 때문이다. 당시 이 책들은 아이들에게 큰 위안이요 희망이었다. 그래서일까 세계명작은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번쯤 또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이 깨진 건 세계명작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어린이 책들이 우스꽝스럽게도 엉성한 줄거리 수준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같은 제목의 책이라도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냐에 따라서 이야기 구조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완역’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어린이용이 아닌 어른용이었고, 어른용으로 나온 책들은 어린이 책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작품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면 볼수록 어린이 책으로 나온 세계명작 치고 제대로 된 책이 없었다. 어린 시절 가졌던 세계명작에 대한 좋은 기억은 세계명작 말고는 볼 책이 거의 없던 당시의 현실과 세계명작이 갖는 이야기성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세계명작은 그 명성만으로도 확실히 명맥을 유지해갔다. 좋은 책은 축약판이라도 아이가 빨리 보면 좋다는 생각과 어렸을 때 읽었던 세계명작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일 거다. 하지만 요약판 세계명작에 대한 문제제기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또 다양한 책들이 출판되면서 세계명작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가만 보면 세계명작이 다시 부흥기에 접어드는 것만 같다. 이곳 저곳에서 세계명작이 중복 출판되고 있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완역 출판’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세계명작을 이야기할 때 요약판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작품 자체를 가지고 할 수 있게 됐다. 작품의 장단점도 좀더 선명하게 가려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역출판을 마구 환영할 수만은 없다. 이런 현상은 어찌 보면 좋은 어린이 책 원고가 없어서라는 생각 때문이다. 완역 출판으로 한 발 앞서 나간 듯 보이는 현실 속에는 빈약한 우리의 출판 현실이 숨어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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