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새롭게 볼 수 있게 해 주는 책
저는 엄마입니다. 또 저에게는 엄마가 있죠.
누구나 처음부터 엄마가 되는 건 아닙니다. 아이를 낳고, 아이를 키우며 엄마가 되어 가죠.
엄마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본다는 건 아기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아, 갓 태어난 아기가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커서 스스로 자기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엄마의 보살핌은 계속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엄마에 대한 책은 한결같습니다. 사랑, 모성애, 책임, 돌봄……. 모두 좋은 말이지만 이런 말을 듣다 보면 엄마는 때때로 숨이 막힙니다. 이런 책임감 말고, 엄마지만 개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요.
엄마에 대한 책 두 권을 봤습니다.
《엄마 도감》(권정민 글, 그림/웅진주니어)
《엄마 인권 선언》(엘리자베스 브라미 글/에스텔 비용-스파뇰 그림/노란돼지)
이 책들은 다른 책들과 달리 엄마를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죠.
《엄마 도감》은 도감의 형식을 빌리긴 했지만 도감은 아니에요. 즉, 이 책은 논픽션은 아니에요. 하지만 엄마에 대해 생각해 본다는 점에서 논픽션 책인 《엄마 인권 선언》과 함께 봤지요.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해요.
엄마가 태어났습니다.
나와 함께.
맞아요. 엄마는 처음부터 존재한 게 아니에요. 아기의 탄생과 함께 엄마도 탄생하는 거죠. 그리고 아기는 이 책의 화자로, 자신의 눈으로 본 엄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도감의 형식을 빌려서 말이지요. 왜 하필이면 도감일까요? 같이 공부하는 모임에 계신 분의 말에 따르면 도감의 기본은 분류이고, 분류란 그 대상에 대해 보다 잘 알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책 역시 도감답게 엄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류하고 있어요.
생김새 / 몸의 구조와 기능 / 몸의 변화 / 먹이 활동 /
수면 활동 / 배변 활동 / 신체 활동 / 반응 속도 /
엄마의 기분 / 호기심의 발달 / 엄마의 상자/ 숨바꼭질 /
엄마는 연구 중 / 엄마의 가방 / 엄마의 엄마
그런데 이 분류를 따라가다 보면 엄마의 모습이 새롭게 보여요. 아기의 눈으로 관찰한 엄마니까요. 간혹 ‘이 정도는 아니잖아?’하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도감이 기본적으로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하려 하지만, 사람이 동식물을 관찰하기에 사람의 관점을 벗어나기 힘들듯이, 이 책 또한 아기의 관점으로 보고 있어서 그럴 거예요.
아무튼 이 책은 새로워요. 지금까지 엄마에 대해 덧붙여진 프레임이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에 가까웠다면 이 책은 엄마를 엄마 자체로 보게 해줘요. 아기의 눈으로 엄마를 보는 순간 엄마는 달라지죠. 그동안 보이지 않던 엄마의 모습이,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엄마의 책임이라는 무게에 가려 애써 외면하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여요. 그건 대상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때문에 생긴 변화이기도 하지만, 엄마와 아기는 함께 탄생한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갓 태어난 아기의 쭈글쭈글한 모습을 보듯, 갓 태어난 엄마는 퉁퉁 부어있고,
엄마의 온몸은 아이를 위한 도구가 되지요.
엄마의 몸은 점점 변할 수밖에요.
모든 것이 아기에게 맞춰진 엄마는 잠을 자도 쪽잠을 자고 밥도 쪽밥(이런 말은 없지만)이에요.
아기의 관점이다 보니 재미있는 발상도 아주 많아요.
아기를 혼자 두기 불안해서 화장실에도 데려가는 모습을 이 책에서 이렇게 표현해요.
100일 이전까지는 화장실 안으로 엄마를 따라 들어가야 합니다.
100일 이후에는 화장실 문 앞까지 따라가 주어야 하고요.
좀 더 자란 엄마는 나와 동시에 배변을 하기도 합니다.
완전히 성장한 엄마는 드디어 혼자 배변에 성공.
화장실 문이 닫혀 있어도 엄마를 믿고 기다려 주세요.
히힛. 웃음이 나요.
관점을 바꾸니 아이 입장에선 이렇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아기에 관한 많은 책들에서 ‘아기들이 이런 행동은 이래서 해요. 그러니 이럴 땐 이렇게 해주세요.’ 하고 말하곤 하잖아요. 하지만 시선을 바꾸니 새로운 모습이 보여요.
그리고 아이가 커나감에 따라 엄마의 모습도 새롭게 보여요. 엄마도 기분이 안 좋거나 숨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죠. 엄마의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책 한 권이 유난히 눈에 띄는 건 그 때문이에요. 바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이 책을 보는 순간 괜히 울컥해지고 맙니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라서 좋은 것 같아요. 책의 말미에는 아이가 깰까 봐 랜턴을 켜고 엎드려 책을 보는 엄마 옆에, 그 엄마를 지켜보는 아이의 모습이 보여요. 아이는 엄마보다 몇 배나 더 큰 모습으로 그려 있어요. 엄마는 조금 쭈글하지만 자신을 지켜보는 아이 덕분에 든든할 거예요. 때때로 엄마의 짐이 될 것만 같은 아이가 뜻밖에 큰 힘이 될 때도 있으니까요. 어둡고 무서운 길을 갈 때 고사리같은 아기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처럼요.
지금까지 엄마에 대해 나온 책 가운데는(제가 본 책 가운데) 가장 만족스러운 책이었어요.
참, 이 책에는 그림책에서 보기 힘든 ‘작가의 말’을 볼 수 있어요. 여기에 옮겨 볼게요.
엄마는 아기와 함께 태어나는 신생 인류입니다.
아기 성장에 관한 보고서는 쌓여 가고 있지만 신생 엄마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지요.
왜 누구도 갓 태어난 엄마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 걸까요.
모든 것이 처음인 세상에서 외롭게 고군분투하고 있을 갓난 엄마들을 생각하며 이 책을 만들었습니다.
《엄마 인권 선언》은 ‘우리 가족 인권 선언’ 시리즈 가운데 한 권이에요. 이 책 외에도 《딸 인권 선언》, 《아들 인권 선언》, 《아빠 인권 선언》이 있으니 함께 보셔도 좋아요.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 선언의 각 조항 형식에 이야기를 담아냈어요. 1조에서 15조까지 ‘엄마에겐 이런 권리가 있어요!’하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완벽하지 않을 권리
아기는 아니어도 사랑받고 보호받고 위안받을 권리
모든 힘든 일을 벼텨내지 않아도 될 권리
엄마의 사생활을 존중받을 권리
하루에 반은 자신의 시간을 누릴 권리
원하는 대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
“맞아, 맞아! 정말 이런 권리가 필요해!”
큰소리로 외치고 싶어져요.
이 책은 국제 앰네스티 추천도서이기도 해요.
그리고 여성가족부에서 ‘나다움 어린이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얼마 뒤 “동성애를 미화·조장하고 남녀 간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이유로 7종의 책이 다시 회수되는 일이 있었어요. 이 시리즈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문제가 된 건 15조 때문이지요.
15조.
원하는 대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
원할 때 아이를 가질 수 있는 권리.
15조의 내용은 《아빠 인권 선언》에서도 똑같이 나와요. 또 《딸 인권 선언》과 《아들 인권 선언》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권리’라고 되어 있지요.
즉, 이 시리즈가 동성애를 조장하는 책이라는 낙인이 찍힌 거지요. 때문에 어떤 도서관에서는 대출 자체가 제한되어 있기도 해요. 이른바 금서 아닌 금서가 된 것이에요. 2022년 대한민국에서 금서라니! 황당하기만 해요.
제가 보기에 이 책은 동성애를 조장하는 책이 전혀 아니에요. 성적 지향은 누군가 조장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민주사회란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라도 똑같이 기본적인 인권을 누려야 하죠. 그렇다면 서로 다른 성적 지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해요.
가족이란 엄마 아빠와 자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결혼을 했어도 자식을 낳지 않을 수도 있고, 한부모 가족도 있고, 또 조부모와 사는 경우도 있어요. 사랑한다면 동성끼리 함께 살 수도 있고, 실제로 이렇게 사는 경우도 많지요.
그러니 가족을 하나의 정해진 틀에 가둘 수는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남들과 달리 같은 성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인권이 무시되는 일은 없어야 해요.
모쪼록 이 책이 다시 도서관 책꽂이에 꽂히고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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