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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책/옛날이야기 공부방

상전을 망하게 한 하인 : 막동이, 왕굴장굴대 등등

by 오른발왼발 2022. 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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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

상전을 망하게 한 하인 : 막동이, 왕굴장굴대 등등

 

 

 

 

이야기의 대강은 이렇다

 

상전이 서울 과거 길에 하인을 견마 잡혀간다. 그런데 가는 길에 하인은 상전의 음식을 더럽혀 못 먹게 하고, 상전이 없는 사이에 말도 팔아먹는다. 결국 상전은 하인의 등에 ‘이놈이 내려가면 죽이라’는 편지를 써서 집으로 내려보낸다. 하지만 하인은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되고 ‘막내딸과 혼인시키라’는 내용으로 바꿔치기한다. 집으로 내려온 상전은 멀쩡히 살아있는 하인을 보고 화가 나서 실컷 두들겨 팬 뒤에 자루에 담아 강가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는다. 그러나 하인은 지나가던 사람을 속여 자신 대신 자루에 들어가게 한다. 그 사실을 모르는 상전은 자루를 강에 빠뜨린다. 얼마 뒤 하인은 주인 앞에 나타나서 덕분에 용궁에 가서 잘 살게 됐다고 한다. 상전은 자신도 용궁에 데려가 달라고 하고, 결국 온 가족이 한 명씩 강물에 뛰어든다. 마지막으로 막내딸이 뛰어내리려 하자, 하인은 정신을 차리라 하고 막내딸을 데리고 상전의 집으로 돌아가 잘 산다.

 

줄거리만 보자면 하인의 행동에 껄끄러운 부분이 꽤 많다. 하인이 기본적으로 못된 놈이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상전을 속여 먹고, 말을 팔아먹고,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던 사람을 속여 자루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죽게 만들고, 상전 집안사람들까지 모조리 죽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상전은 어떨까? 사실 상전 또한 마찬가지다. 이야기에 따라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하인을 서울 가는 길에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처음부터 품고 가는 경우도 있고, 실제로 등에 이놈이 내려가면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자루에 매달아 둔 뒤 강에 빠뜨려 죽게 만들기도 한 것이 모두 상전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마음에 안 드는 하인을 죽이려던 상전이, 그 사실을 알게 된 하인의 손에 죽게 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다.

이상한 건 껄끄럽고 걸리는 것이 상전의 모습이 아니라 하인의 모습이라는 점이다. 분명 이야기하는 화자들은 대부분 하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하인의 행동이 신경이 쓰인다. 참으로 고민스러웠다. 혹시 옛이야기의 주인공은 착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님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이야기를 만난 지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민은 해결되지 않았다.

 

서울로 가는 길

 

꼼꼼히 이야기를 다시 봤다. 이야기의 중심은 하인과 상전의 대립구조다. 전통사회는 상전의 세계관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고, 하인은 상전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존재다. 둘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서울로 떠나기 전부터 하인이 상전을 속이길 잘 하는 모습이 나오고, 이런 하인이 마음에 안 든 상전이 서울 가는 길에 하인을 죽여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상전은 하인을 견마 잡혀 서울에 간다. 길에는 상전과 하인 둘뿐이다. 집은 상전의 세계관을 지탱해주는 여러 조건들이 구비되어 있는 공간이었지만, 길에는 그런 것이 없다. 기존의 질서에 틈이 생긴다. 상전은 하인을 마음껏 부릴 수 있지만, 실상 상전의 모든 건 하인에게 달려 있다. 혼자서는 말을 타고 갈 수 없는 상전은 하인이 잡은 말고삐에 끌려가는 셈이고, 스스로 가게에 가서 먹을 것을 사 올 수도 없다.

이 틈을 이용해 막동이는 상전을 본격적으로 놀려먹는다. 상전이 사 오라고 한 먹을 것을 더럽히는 모습을, 상전 앞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만약 상전이 그 모습을 안 봤다면 먹을 수도 있었겠지만 눈앞에서 보았으니 먹을 수도 없다. 결국 상전은 쫄쫄 굶고 만다. 그래도 상전은 스스로 먹을 것을 사 오지 못한다. 그건 자신의 세계관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눈 : eye

 

이야기에서는 유난히 눈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하인이 음식을 더럽히는 걸 상전이 보게 되는 건 그 시작일뿐이다.

상전은 볼 일을 보러 가며 하인에게 말한다.

서울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곳이니 조심하라.”

그러자 하인은 말을 팔아먹고는 눈을 감고 한 손으론 말고삐를 잡고, 한 손으론 코를 움켜쥐고 있는다.

화가 폭발한 상전은 하인의 등에 이놈이 내려가면 죽이라는 편지를 써서 집으로 내려보낸다. 하인은 자신의 죽음을 등에 지고 가지만 그걸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야 편지 내용을 알게 된다. 아마도 하인은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하인이 자루에 매달려 있을 때도 눈 이야기는 또 나온다. 하인이 속임수로 자신 대신 자루에 들어가게 했던 인물은 대부분 소경이거나 애꾸거나 눈병이 났다. 또 하인은 자루에서 뜬금없이 내 눈 빤짝 내 눈 빤짝이라고 외쳐 주목을 끌고, 이들에게 자루에 들어와 있으면 눈을 뜨게 되고 눈병이 낫는다고 한다.

왜 하필 눈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자루에 들어가게 되고, 그 때문에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 혹시 눈에 문제가 있던 사람이 하인 자신이었던 건 아닐까? 하인은 자루에 매달려 눈이 빤짝 새 눈이 빤짝하고 외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말을 할 리는 없다. 자루에 매달려 있던 하인은 그 속에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떤 깨달음이 반짝하고 왔을지 모른다. , 새롭게 눈이 트였던 것이다. 상전의 딸과 혼인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문제를 없애려면 상전 일가가 모두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지나가다 하인의 꾐에 빠져 자루에 대신 들어가게 된 사람은 지금껏 제대로 보지 못하던 하인 자신일 수도 있다. 지나가던 사람이 하필이면 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여겨진다. 즉 하인은 이전의 자신을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하인이 갇혀 있는 곳이 다름 아닌 자루라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자루에 갇혀 있다 밖으로 나오는 것은 자궁에서 태어나는 것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

 

눈은 우리가 무언가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기관이다. 우리는 눈으로 들어온 자극을 뇌에서 인지함으로써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고 할 때, 눈을 빼놓고 이야기하기 힘들다.

하지만 눈으로 같은 것을 본다고 해서 다 같은 것을 봤다고 할 수는 없다. 똑같은 것을 보고도 사람마다 보는 것이 다르다. 어떤 사람이 본 것을 다른 사람은 전혀 못 보기도 한다. 당연히 보는 것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는 것도 다르고 세계관도 달라진다.

상전과 하인은 서로 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상부구조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상전은 자신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 하인이 죽여 마땅한 놈으로 보인다. 반대로 하부구조의 세계관을 갖고 있는 하인은 이 세계가 부조리하기만 하다. 하지만 하인이 탄탄한 상부구조의 세계가 버티고 있는 현실에서 이를 깰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는 없다. 그저 반항을 하거나 슬쩍 놀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자신보다 약한 누군가를 골려 먹거나 하는 식으로 표출된다.

하인이 달라지는 건 자기 등 뒤에 쓰여 있는 편지의 내용을 알게 된 뒤부터다. 하인은 편지 내용을 확인 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세계의 정체를 보게 된다. 그래서 하인은 딸과 자신을 결혼시키라고 편지 내용을 바꿔치기 한다.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전과 일가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인의 관심은 오로지 상전과의 관계뿐이다. 이때부터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하인이 자신보다 약한 아녀자나 꿀장수 등을 골려먹는 이야기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인은 상전의 딸과 결혼한다. 이는 기존 세계관의 균열을 뜻한다.

 

바꿔치기

 

이야기에서는 하인이 바꿔치기를 하는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우선, 밥을 먹어 치우고 똥으로 바꿔치기한다. 말을 끌고 가느라 힘든 하인은 배가 고파 상전에게 밥을 먹고 가자 한다. 하지만 말 위에 앉아서 가는 상전은 배고플 리가 없다. 상전이 계속 거부하자 하인은 밥이 오래되면 똥이 된다고 말하고는 몰래 밥을 먹어 치우고 똥을 넣어 둔다.

두 번째는 편지를 바꿔치기하는 것이다. 이는 밥을 똥으로 바꿔치기하는 것과 다르다. 밥을 똥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 홧김에 상대를 골탕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면, 편지를 바꿔치기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자, 자신도 상전의 일가가 되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자루에 갇히게 되자 지나가던 사람을 속여 자신과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이는 편지 바꿔치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하인은 편지 바꿔치기를 통해 막내딸과 결혼을 할 순 있었지만 상전의 일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히려 괘씸죄가 더해져 상전은 하인을 실컷 두들겨 패서 자루에 매단 뒤 죽이려 했다. 그리고 바꿔치기로 살아난 하인은 상전 일가를 몰살시킨다.

즉 하인의 바꿔치기 결과는 상전 골탕 먹이기 -> 상전의 일가 되기 -> 상전 일가 몰살시키기는 것으로 과감하게 바뀌어 간다. 하인의 입장에서 이는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을 것이다.

상전의 세계는 무너졌고, 하인의 세계가 새로 만들어진 셈이다.

 

상전이 보지 못한 것

 

상전은 자신이 마음껏 부려 먹던 하인에 의해 죽는다. 자신만 죽는 게 아니다. 온 가족이 모두 죽는다. 단 한 사람, 하인과 혼인을 한 막내딸만 빼고서.

상전은 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상전은 자기가 죽였다고 생각한 하인이 좋은 옷을 입고 나타나 용궁에서 잘 살고 있다는 말에 깜박 속아 넘어간다. 자신도 용궁에 데려가 달라고 한다. 욕심이 지나쳐 화를 자초한 셈이다.

하지만 단순히 욕심 때문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욕심이 앞서 중요한 무언가를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싶다.

하인은 자신이 두 번이나 죽이려 했던 존재다.1)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겠는가? 하지만 하인이 좋은 옷을 입고 주인 앞에 나타난 순간, 상황은 하인이 주도하는 세계로 옮아갔고, 욕심이 눈이 먼 상전은 다른 것들은 보지 못한다. 하인이 여러 일을 겪으며 새롭게 눈을 뜨게 된 반면, 상전은 기존의 세계관에 갇혀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으로 머물렀기 때문이다.

상전의 세계는 무너졌고, 하인의 세계가 열렸다. 하인은 이제 상전이 됐을 터이다.

하인은 앞으로도 잘 살아나갈까? 아마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계속될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인 역시 상전처럼 그 세계에 갇혀 지낸다면 언제든지 상전의 꼴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서늘하다. 상전과 하인은 물론이고 자기 세계에 갇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에게 경고를 주기 때문이다.

 


1) 이야기에 따라 세 번일 경우도 있다. 상전은 가는 길에 하인을 발로 걷어차 죽이려 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책만 잃어버리고 만다. 과거길에 필요한 책을 잃어버림은 이미 상전이 그 세계를 지탱할 힘을 잃어버림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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