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이’가 ‘장군’이 되다
-‘식충이’ ‘밥장군’ ‘호박충이’ ‘호박장군’ 이야기-
1.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
엄청난 양의 밥을 먹어 치우는 사람이 있었다. 보통 사람의 열 배나 많이 먹었다고도 하고, 하루에 밥을 서 말씩 먹었다고도 하고, 혹은 호박을 한 가마나 끓여 먹었다고도 한다. 먹어 치우는 양이 남다른 만큼 몸집도 남달랐다. 누가 봐도 ‘장군감’이라 할 만큼 큰 풍채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뿐, 힘은 보통 사람들의 십 분의 일이나 될까? 아무튼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붙은 별명은 ‘식충이’, ‘호박충이’, ‘식대 장군’, ‘밥장군’ 등이다.
‘식충이’는 말 그대로 밥만 먹는 밥벌레라는 부정적인 의미다. 먹을 게 넉넉지 않았던 시절 남들보다 유난히 많은 밥을 먹는 사람이 있으면 나머지 사람들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밥을 많이 먹는 대신 힘이 세서 열 사람 몫 이상의 일을 해낼 수 있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이 사람은 밥만 많이 먹지 힘이 없으니 일을 할 수가 없다. 이래저래 주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식대 장군’ ‘밥 장군’은 큰 풍채 덕분에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아무리 ‘장군’이라 불렸어도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사람을 진짜로 장군이라 생각했을 리는 없다. 일종의 반어법처럼, 속으론 놀리듯이 불렀을 게 뻔하다.
엄청난 양의 밥을 먹어 치우지만 힘은 없는 사람.
갑자기 그림책 한 권이 떠올랐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쿠어트 바우만 글/스타시스 에이드리게리치우스 그림/마루벌)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사람이 있었어.
온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옛이야기 속 주인공과 똑같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옛이야기 속 주인공보다 훨씬 심하다. 그림책의 주인공은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에 다른 사람의 밭에 있는 농작물도, 자기가 살던 숲도 먹어 치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먹어 치우는 양이 달라도 공통점은 분명하다. 엄청난 양을 먹어 치우면서도 힘은 없다는 것!
2. 커다란 몸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
옛이야기 속 주인공은 집을 떠난다. 집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스스로 집을 나오기도 한다.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는 달라진다. 그걸 확인시켜 주는 건 주인공이 만난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이다.
사람들은 주인공의 엄청난 풍채를 보고 그가 엄청난 힘을 가진 장군이라 생각한다. ‘충이’ 취급을 받던 처지에서 갑자기 ‘장군’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주인공이 원하는 만큼 푸짐하게 먹을 것을 차려준다. 그들에게는 장군감이 찾아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군감을 찾던 그들에게 나타난 주인공은 그들이 찾던 당당한 장군의 모습 그 자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자신의 소망을 말한다. 이야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는 호랑이를 잡아달라거나 도적들을 잡아달라는 것이다.
밥숟가락 들 힘밖에는 없는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소원이 접수된 셈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능청스럽게 그 청을 받아들인다. 밥도 얻어먹었겠다, 더구나 지금까지 ‘충이’ 취급만 받고 살아온 그를 ‘장군’으로 대접해주니 이에 부응해줘야겠다는 마음도 생겼겠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대접에 자신감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세상일이란 자신 있게 나선다고 해서 할 수 없던 일을 갑자기 할 수 있게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약간의 운이 따라준다면 상황은 생각지 못했던 쪽으로 흘러갈 수도 있는 법이다.
집을 떠나 그를 장군으로 대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자 운도 함께 찾아온다. 그러나 그 운은 저절로 아무런 노력 없이 찾아오는 건 아니다.
<발가벗고 호랑이 잡은 밥장사>(대계, 고근록 구술)에서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에게 원수를 갚으려는 사람은 그에게 자신이 호랑이와 싸울 때 “날 봐라” 소리 한 번만 질러주면 이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둘이 싸우는 걸 본 주인공은 겁이 나서 소리도 못 지른다. 다음 날이 되자 주인공은 혼자 호랑이 굴 앞에 가서 발가벗고 호랑이를 부른다. 하지만 막상 호랑이가 싸우러 나오자 주인공은 까무러치고 만다. 호랑이는 싸울 상대 대신 널브러져 있는 커다란 살덩어리를 보고 너무 기쁜 나머지 이리저리 펄쩍펄쩍 뛰며 난리를 친다. 그러다 굴 앞에 있던 큰 고목나무 가지에 그만 머리가 턱 걸려서 죽고 만다. 까무러쳤던 주인공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뒤였다.
주인공은 처음에는 겁이 나서 “날 봐라”하는 소리도 못 지른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스스로 혼자 호랑이 굴을 찾아가 호랑이를 불러낸다. 옷을 다 벗고 발가벗은 채로! 왜 하필 발가벗은 걸까? 호랑이가 그냥 한입에 꿀꺽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 날뛸 수 있게 계획한 것일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다른 생각도 든다. 엄청나게 먹어 커다래진 몸, 이전까지 열등감의 상징과도 같았던 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몸에 대해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이렇게 드러내는 순간, 몸은 그 자체로 문제를 해결해 나갈 자산이 된다. 이야기에 따라 숨어 있다 소리를 지르거나, 똥을 무더기로 쏟아냄으로써 호랑이를 잡는 이야기도 있다. 목소리나 똥이나 그 터져 나오는 힘의 원천은 바로 몸이다. 커다란 몸에 대한 혐오가 긍정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3. 몸의 허기를 채울 수 있는 자와 채울 수 없는 자
주인공은 ‘충이’라 놀림 받으면서도 먹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먹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허기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난 혼자서 살았어요.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과 사랑을 조금도 받지 못했어요.
아내라면 그걸 베풀 수 있겠죠.
허전해서 자꾸 먹어대는 겁니다.
세상 여기저기 널린 것을 다 내 뱃속에 넣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이 갖고 있는 허기의 원인은 ‘어머니의 다정한 손길과 사랑’이다. 구강기에 충분한 보살핌과 자극이 주어지지 않은 경우, 아이는 배고픔과 같은 신체적 고통과 더불어 버려졌다는 심리적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그리고 성장한 뒤에도 만성적인 우울감과 허무감을 갖는다. 이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을 스스로 제공하는 동시에, 어머니를 씹어 삼킴으로써 분노를 표현하는 복수의 의미도 지닌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가 있다》,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극복하는 방법>, 김혜남, 프로체, 2021.)
배고픈 사람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진다.
아마 옛이야기의 주인공도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에는 원인이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다만 짐작할 수는 있다. 주인공이 달라진 건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인정’을 받으면서다. 그렇다면 집안에서 주인공은 가족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렇게 보니 호랑이를 잡고 난 뒤 주인공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용기를 내서 움직였고, 그 결과 자신이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랑이를 잡았으니 사람들은 더욱더 주인공을 인정했을 테고, 주인공은 앞으로 점점 달라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비극적인 일이지만 《아무리 먹어도 배고픈 사람》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맺는다. 사랑에 목이 말랐던 그는 한 여자에게 청혼한다. 하지만 여자의 아버지는 괴물 사위를 볼 수 없다며 결사반대한다. 그리고 칠 년이 지난 어느 날 우연히 부녀를 만난 배고픈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에 내가 따님과 결혼하는 걸 못하게 했죠.
날 업신여겨가면서.
난 마리를 사랑했어요.
이제는 난 복수하겠어. 마리를 잡아먹을 거야.
마리만 먹는 게 아냐.
당신부터 먹어 치울 거야.”
배고픈 사람은 마리와 결혼을 통해 자신을 허기지게 했던 문제를 해소하려 했지만 이를 거절당하자 괴물이 되고 만다. 칠 년 뒤 마리와 아버지를 다시 만난 배고픈 사람은 두 사람을 먹어 치운다. 감옥에 갇히자 쇠사슬도 먹어 치우고, 간수와 쇠창살도 삼켜버린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배고픈 사람이 꿀꺽꿀꺽 삼키는 모습은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오나시를 떠오르게도 한다. 가오나시는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던 센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금을 내주지만, 센이 금을 받지 않자 분노해 괴물이 된다. 괴물이 됐다는 점에서는 배고픈 사람과 같지만 둘은 차이가 있다. 배고픈 사람은 마지막까지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않았지만, 가오나시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도움을 주려는 센이 있었다. 가오나시는 센이 먹인 약 덕분에 모든 걸 토해내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몸의 허기는 심리적 허기다. 옛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상에 나와 그 허기를 채웠고, 가오나시도 센이 준 약 덕분에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렇지만 끝까지 몸의 허기를 채우지 못한 배고픈 사람의 이야기는 비극적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비극에 그치지 않는다. 뭐든지 꿀꺽꿀꺽 먹어 치우는 존재는 사회의 비극이기도 하다.
4. 누구나 한없이 배고플 수 있다!
옛이야기와 그림책을 살펴보다 보니 영화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여섯 가지 에피소드 가운데 한 편인 <마녀의 성>이 떠오른다.
어느 날 왕은 마녀의 성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공주와 결혼시키겠다 선언한다. 수많은 사람이 온갖 무기를 동원해 마녀의 성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 그러자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한 청년이 자신이 해 보겠다며 나선다. 무기 하나 없이 마녀의 성으로 가는 그를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 그는 마녀의 성에 다가간다. 그리고 똑 똑 똑 성문을 노크한다. 빼꼼 성문을 연 마녀에게 묻는다. 들어가도 되겠느냐고. 마녀는 그를 성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럼 청년은 공주와 결혼했을까? 아니다. 청년은 마녀의 성을 구경하는 동안 마녀가 얼마나 똑똑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공주 대신 마녀와 결혼을 한다.
성에서 문을 꼭꼭 닫아걸고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대응으로 상대를 몰살시키던 마녀, 그 마녀 역시 옛이야기의 주인공이나 배고픈 사람과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다. 마녀가 바란 것은 자신의 성에 다가오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무력으로 다가오지 말고, 자신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만약 청년이 노크를 하고 다가오지 않았다면 마녀는 계속 무시무시한 마녀로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녀의 마음을 헤아린 청년 덕에 마녀는 새롭게 발견될 수 있었다.
아무리 먹어도 계속 먹고 또 먹을 때가 있다. 아무리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어떤 것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 그 이유는 다 다르다. 어려서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보살핌과 자극이 근본 원인일 수도 있지만 커가면서도 끊임없이 허기를 부르는 일들이 생긴다. 우울감, 자포자기하고 싶은 마음, 스트레스……. 뭔가 나를 채우고 싶지만 제대로 채울 방도를 찾지 못하면 먹을 것으로 채워 넣게 된다. 엄청나게 먹고 또 먹어 치우지만, 진짜 채워져야 할 것은 채워지지 못했기에 몸집은 커져도 무기력하고 기운이 없을 수밖에 없다.
무기력해질수록 주위 세계와 차단하려는 마음은 점점 커진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주위와 고립되고 만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를 싸안고 있는 그 안에 완전히 몰입된 상황에서는 해결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옛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상에 나와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가오나시는 센의 도움을 받았고, 마녀는 청년에게 새롭게 발견됐다. 즉, 그들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풀어줄 사람을 만난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배고픈 사람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이렇게 누군가 해결의 통로를 뚫어주면 그 사람도 바뀔 수 있다. 옛이야기 주인공은 자신을 인정해주는 사람들 덕에 호랑이 앞에 나서는 용기를 낼 수 있었고, 마녀 역시 청년을 만난 덕에 자신의 세계를 내보일 수 있었다.
어쩌면 배고픈 사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옛이야기 주인공이 ‘충이’에서 ‘장군’으로 거듭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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