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기, 잣대 대기
- ‘흰쥐’ 혹은 ‘혼쥐’ 이야기 -
남자는 낮잠을 자고 여자는 바느질을 한다.
여자는 잠자는 남자 코에서 흰 쥐 한 마리가 나오는 걸 발견한다.
여자는 쥐를 따라가 본다. 쥐가 장애물을 만나면 슬쩍 도움을 주기도 한다.
쥐는 한참을 돌아다니다 남자의 콧구멍으로 도로 들어갔고, 그러자 남자는 잠에서 깬다.
남자는 꿈 이야기를 한다. 꿈에서 어디어디를 돌아다니다가 금항아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남자가 꿈에서 돌아다녔다는 곳은 흰쥐가 돌아다닌 곳과 같았다.
여자는 남자와 함께 금항아리를 발견했다는 곳으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진짜 금항아리를 발견해 부자가 된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야기도 있다.
남자는 낮잠을 자고 여자는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남자 코에서 쥐가 나온다. 그런데 그 쥐는 흰쥐가 아니라 까맣거나 빨갛다. 한 마리일 때도 있지만 두 마리, 혹은 세 마리가 나온다.
여자는 그 쥐를 잡아 죽인다. 두 마리 혹은 세 마리일 경우 그 중 하나 혹은 두 마리를 죽인다. 그러자 도둑질을 하던 남자가 더 이상 도둑질을 안 하게 됐다.
코에서 나온 쥐의 정체
두 이야기 모두 공통된 건 남자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 남자의 코에서 쥐가 나온다는 점이다. 남자의 코에서 나온 쥐의 정체는 뭘까?
구연자들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나오는 말에 정답이 있다. 그 쥐의 정체는 바로 ‘혼’이다.
사람 몸에서 혼이 빠져나가다니? 그럼 죽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은 죽은 것과 비슷하게 육체가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혼이 그사이 빠져나오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리고 빠져나온 혼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그 사람이 잠에서 깨어날 때 다시 들어간다. 이때 혼이 돌아다니며 본 것이 꿈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자는 사람의 얼굴에 낙서를 하면 혼이 주인을 찾아 들어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자는 사람 얼굴에 절대 낙서를 하면 안 된다는 금기가 생기기도 했다.
이때 혼이 나오는 곳은 콧구멍이다. 콧구멍은 숨구멍이라고도 한다. 사람은 코로 숨을 쉰다. 사람이 죽었는지를 확인할 때 콧구멍에 손을 대보거나 얇은 종이를 갖다 대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혼을 속된 말로 혼꾸멍이라 하는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일 것이다.
낮잠을 자는 자, 깨어있는 자
이야기에서 남자는 낮잠을 잔다. 잠은 본래 밤에 자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낮잠을 잔다는 것은 남자가 낮과 밤의 경계에 있다는 뜻이다. 낮과 밤은 다른 의미로 삶과 죽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즉 남자는 경계의 시간대에, 살아있지만 마치 죽은 듯 심신이 미약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남자 옆에는 여자가 있다. 바느질하던 여자는 남자의 코에서 쥐가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여자는 남자와 많은 날을 함께 지냈을 텐데 왜 하필 그날, 처음으로 코에서 나오는 쥐를 발견했을까? 그건 남자는 낮잠을 자고 바느질하는 여자는 깨어있다는 데 해답이 있을 듯하다. 바느질이란 ‘바늘에 실을 꿰어 옷을 짓거나 꿰매는 일’이다. 즉 바느질이란 무언가를 만들거나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결국 여자는 활동 시간대에 자기완성을 위해 깨어있었기에, 죽은 듯 무기력한 상태에 있던 남자의 코에서 나오는 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쥐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 이야기
재밌는 건 이야기 종류에 따라 나타나는 쥐의 색깔이 다르다는 점이다. 금항아리를 발견하는 이야기에서는 ‘흰쥐’ 한 마리이지만, 남편이 도둑일 경우는 까맣거나 빨갛다,
쥐의 색깔을 낮과 밤, 삶과 죽음으로 생각해 보면 ‘희다’는 것은 낮과 삶, ‘검다’는 것은 밤과 죽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빨강은 이 틀에서는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금지, 정열, 힘, 불안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흰쥐’가 나오는 남자는 비록 낮잠에 빠져 무기력해 있긴 하지만 삶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흰쥐를 따라가 남자의 꿈을 확인한 여자는 남자가 꿈속에서 봤던 금항아리를 발견한다. 이때 흰쥐는 남자의 혼이자, 무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의 무의식 속의 금항아리를 꺼낼 힘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였고, 깨어있던 여자의 도움으로 금항아리를 발견한다. 즉 여자는 단순히 호기심으로 쥐를 따라갔다 행운을 얻는 존재가 아니라 깨어있는 자로서, 무기력에 빠진 남자의 문제를 해결해서 깨어있는 세계로 안내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자의 코에서 ‘흰쥐’가 아닌 ‘검은 쥐’가 나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혼이 어둡고 불길한 상태임을 뜻한다. 남자의 직업이 도둑이라는 것이 바로 이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검은 쥐를 발견한 여자는 그 검은 쥐를 바느질을 할 때 쓰던 자로 때려잡는다. 그러자 그 뒤부터 남자는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됐다고 한다. 재밌는 건 여기서 쥐를 죽일 때 ‘자’를 도구로 썼다는 점이다. 흔히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 판단을 할 때 ‘잣대’를 들이댄다고 한다. 남자의 올바르지 못한 행동에 잣대를 들이댄 셈이다. 그리고 남자 입장에서는 여자의 엄중한 잣대에 魂이 난 셈이다. ‘혼나다’란 혼(魂)이 빠져나갈 만큼 놀라고 무서운 일을 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비슷한 말로 ‘혼쭐나다’란 말도 있다. 이때 놀라고 무서운 일이란 ‘호된 꾸지람을 듣거나 벌을 받는’ 것을 뜻한다.
여러 마리 쥐, 여러 인격
남자의 도둑질하는 버릇을 고치고자 했던 여자의 눈에는 검은 쥐가 나타났고, 이를 퇴치하여 남자의 도둑질하는 버릇을 고칠 수 있었다. 남자의 코에서 나온 흰 쥐를 발견한 여자는 그 흰 쥐를 따라가다 도움을 준 덕으로 금항아리를 찾을 수 있었다. 현명한 여자 덕에 나쁜 버릇을 고친 남자는 좋은 남자가 됐을 테고, 가난한 남자는 부자가 됐다. 그러니 결국 두 이야기 모두 해피앤딩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도둑질하는 남자의 몸에서는 대부분 쥐가 여러 마리 나온다. 쥐가 여러 마리 나온 것은 혼이 여러 개 있다는 뜻이다. 이는 달리 말하면 몸 안에 여러 인격이 존재한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마냥 착하기만 하거나 혹은 나쁘기만 한 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때 한 마리만 나온 경우는 하나의 인격만 발현된 것이고, 여러 마리가 나왔다면 동시에 여러 인격이 발현된, 종잡을 수 없는 상태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나쁜 버릇을 고친 남자의 코에서 흰 쥐가 나오고, 흰 쥐가 나왔던 남자의 코에서 검은 쥐가 나오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진다. 그때마다 여자가 쥐를 발견해 적절한 조치를 취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조력자가 늘 곁에 있을 수만은 없다. 자신의 문제는 다른 사람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결국 잣대는 자기 자신에게도 꼭 필요한 셈이다. 앞에서 언급하진 않았지만 흰쥐를 따라가던 여자도 잣대를 쓴다. 흰쥐가 고여 있는 빗물을 건너지 못하자 잣대를 대 줘서 건너가게 한다. 이때의 잣대는 퇴치의 잣대가 아니라 도움의 잣대다. 잣대란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움을 주고, 퇴치할 필요가 있을 땐 퇴치를 하는 도구다.
하지만 잣대는 잘 사용해야 한다. 어쭙잖은 잣대로 잘못 사용하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여자가 잣대를 적절하게 잘 사용할 수 있었던 건 깨어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곱씹으며 되뇌게 된다. 늘 깨어있으라. 그래야 제대로 잣대를 댈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옛날이야기 책 > 옛날이야기 공부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잊음이 심한 사람' 혹은 '정신없는 사람' 이야기 (2) | 2022.10.15 |
---|---|
길에서 사람의 뼈를 만난다는 것은.... (0) | 2022.10.12 |
화수분 - '이상한 그릇', '신기한 화로' (0) | 2022.07.06 |
식충이, 밥장군, 호박충이, 호박장군 (0) | 2022.06.17 |
세 가지 유산, 호랑이 잡은 피리, 삼 형제 (0) | 2022.05.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