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는 여성들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
세상은 분명 남성과 여성 모두의 힘으로 돌아갈 텐데, 역사책 속에선 여성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기만 하다. 역사를 남자들의 이야기(HIS STORY)가 아닌 여자들의 이야기(HERSTORY)로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보게 된 두 권의 책이 있다.
《언니들의 세계사(HERSTORY)》(캐서린 핼리건 글/새라 월시 그림/책읽는곰/2018.11.13.)
《처음 만나는 여성의 역사》(카타지아 라지비우 글/요안나 차플레프스카 그림/토토북/2020. 4. 28.)
《언니들의 세계사(HERSTORY)》를 처음 발견했을 때, 정말 기뻤다. 역사 속 여성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여성들이 세상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기존의 역사책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여자들의 이야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책을 보고 난 느낌은 ‘책 한바닥 분량으로 써 내려간 50명의 여성 인물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그 50명은 ‘신념과 리더십’, ‘상상력과 창의력’, ‘희생과 봉사’, ‘사고력과 문제 해결 능력’, ‘희망과 극복’이라는 다섯 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각 10명씩 소개되고 있었다. 역사책의 카테고리라고 보기엔 좀 당황스러웠다.
‘뭐지?’ 싶었다. 이 책의 원제인 《HERSTORY》라면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한데, 《언니들의 세계사》란 제목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의 부제는 ‘역사를 만들고 미래를 이끈 50명의 여성 인물 이야기’다. 한국어 제목 때문에 오해를 한 셈이다.
다시 50명의 여성 인물들에 대해 꼼꼼히 읽어나갔다. 각각의 인물들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서 시작해 이들이 어떻게 세상을 움직였는지로 마무리하고 있었다. 형식을 이렇게 정해놓다 보니 어린 시절의 이야기의 경우 그 인물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한 인물을 짧은 글로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무의미한 내용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또 다른 의문도 생겼다. 과연 세계사에서 이 50명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의 대부분이 미국과 유럽인이라는 점은 역시 불편했다. 이 점은 HerStory가 아닌 HeStory에서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적어도 역사를 HerStory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서술하려고 했다면 좀 달라졌어야 하지 않았을까? 또 새커저위아의 경우처럼 아메리카 인디언이면서도 백인들의 아메리카 서부 개척의 선도자 역할을 인물을 선정한 것도 걸렸다. 백인들의 입장에서는 훌륭할지 몰라도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는 결코 그렇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50명 속에 헬렌 켈러와 그의 스승인 앤 설리반이 함께 들어갈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했다.
아쉬움은 또 있다. 각 카테고리 속의 인물들의 배치 순서는 시대와 상관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작가만의 특별한 규칙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대뿐 아니라 지역도 다른 각각의 인물들이 특별한 규칙 없이 등장하다 보니 세계사의 측면에서 인물들을 볼 수가 없었다. 또한 ‘남자들만 잘하는 게 아니다. 남자들 못지 않은……, 남자들도 하지 못한……’ 식으로 끊임없이 남자들과 견주는 것도 좀 불편했다. 여성의 역사라기보다는 남자의 세계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여자들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그동안 덜 알려져 있던 여성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 정도이다. 미국 노예탈출 시기 비밀조직인 ‘지하철도’의 차장이었던 해리엇 터브먼이나 동화작가이자 화가이기에 앞서 미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였던 비어트릭스 포터, 반나치 활동을 했던 백장미단의 조피 숄 등은 앞으로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처음 만나는 여성의 역사》는 인물 중심의 《언니들의 세계사》와는 달리 통사적인 접근방법으로 서술하고 있었다.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중세 시대, 16~17세기, 19세기, 20세기, 21세기 현재.
시대는 이렇게 나뉘어 있다.
시대 구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 책 역시 철저하게 유럽 중심이다. 이는 작가가 폴란드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기존의 역사와 별 차별성이 없는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경우는 간단히 간단히 짚고 넘어가거나 빼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고대 이집트부터는 좀 달라진다. 이 책이 아무리 유럽 중심이라 해도, 여성의 역사라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다. 기존의 역사책에서 알려주지 않던 여성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고대 그리스 시대였다. 이 시기, 여성들이 아무런 권리를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이를 낳고도 남편에게 아이를 집에서 키워도 좋다는 허락을 받지 못하면 버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것도 ‘민주주의’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아테네에서 말이다. 아무래도 아테네의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듯 싶다. 소크라테스의 부인이었던 크산티페에겐 박수라도 쳐주고 싶어진다.
고대 로마도 고대 그리스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역사상 최초로 여자들의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기원전 216년 로마는 카르타고와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때 죽은 남자들의 재산을 아내와 딸들이 물려받았으나 국가에서는 그 돈으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며 여자들에게 절약을 강요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뒤, 남자들은 온갖 사치와 쾌락을 누렸지만 여자들에 대한 금지는 풀았다. 결국 여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중세를 암흑의 시기라고 배웠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 적어도 여성에게 중세는 암흑이 아니라 빛을 발견한 시기였던 것 같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여긴 기독교의 영향으로 여성들의 삶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결혼하는 것 말고는 다른 삶을 찾을 수 없던 여자들은 결혼 대신 수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녀원은 여자가 마음껏 공부하고 책을 읽고 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고 한다. 수녀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이 책은 기존의 역사책과는 전혀 다르다. 시대에 따라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해 왔고,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아직도 세상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이 많기 때문이다.
이 책이 비록 유럽 중심이기는 하나, 우리에게 의미 있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의 삶과 투쟁이라는 보편적 사실은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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