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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 책/옛날이야기 공부방

손 없는 색시

by 오른발왼발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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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여성을 구원하리라

- 옛이야기 '손 없는 색시'가 말하는 것 -

 

 

 

 

<손 없는 색시>는 계모가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아주 특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장화 홍련>이나 <일곱 오라비 접동>처럼 딸을 음해해 죽이어거나 전처의 딸을 구박하는 이야기가 많지만 이처럼 손을 잘라내고 내쫓는 경우는 유일하다.

도대체 새어머니는 왜 전처 딸의 손목을 잘랐을까?

 

한국구전설화(평민사)에 실린 두 편의 이야기에서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는 사연이 없다. 하지만 한국구비문학대계<전처 딸 모해한 악독한 계모>를 보면 딸이 5살 때 재혼을 했고, 사건이 일어나는 건 15살 때라고 나온다. <계모에게 쫓겨난 손 없는 처녀><손 없는 색시>에서도 나이는 나오지 않지만 과년한 처녀혹은 시집갈 나이가 되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비슷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제주도 채록본 <다슴어멍 이야기(첫번째)><다슴어멍 이야기(세번째)>에서도 17세쯤이라 했다. 한국구전설화에서는 나이대가 나오진 않지만 쫓겨난 딸이 곧 배나무집 아들과 함께 사는 것으로 보아 연령대는 비슷하리라 짐작할 수 있다.

처녀가 손이 잘리고 쫓겨난 연령대는 중요하다. 처녀의 여성성이 꽃피는 시기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계모 이야기들과 다른 차이다. 만일 다른 계모 이야기들과 같으려면 <전처 딸 모해한 악독한 계모>는 처음부터 딸을 구박하지, 굳이 10년이 지난 뒤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른을 위한 그림 동화 심리 읽기2(교양인)에서 오이겐 드레버만은 그림형제의 <손 없는 소녀>를 해석하며 손을 자른다는 것은 여성의 성적 매력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다. 손을 자르는 시기가 딸이 한창 꽃다운 시기라는 점을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러고 보니 두 손을 펼친 모습은 마치 빛이 비추는 모습을 닮아 있다.

결국 계모가 전처 딸의 손을 자른 것(혹은 음해를 통해 아버지가 손을 자르게 하거나)은 여자로서 매력을 발산하는 딸의 모습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것이다. 딸을 감싸는 아버지로부터 여성으로서 딸과의 경쟁 관계에서 밀린다는 위기의식이 때문이다.

손을 자르는 사람은 계모이기도 하고, 계모가 데리고 아들이기도 하고, 계모에게 휘둘린 아버지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손을 자르는 경우는 대개 처녀가 아이를 가졌다는 음해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아무튼, 딸은 막 피어오르는 여성성을 잘린 채 집에서 쫓겨난다. 손이 없으니 무언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졌다. 마치 퇴행한 듯 누군가 물을 먹여줘야 물도 겨우 먹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떠돌다 어느 집 앞에(혹은 담장 안에) 있는 배나무를 발견하고 배를 따먹으려 올라간다. 손이 잘린 뒤 스스로 무언가를 한 첫 번째 사건이다.

하지만 손이 없으니 배를 제대로 따먹기는 힘들다. 마치 아기가 첫 도전에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듯 처녀도 배 하나를 오롯이 먹지 못하고 이것저것 건드려만 놓는다.

하지만 스스로 배를 따 먹으려 한 이 시도는 의외의 결과를 낳는다. 이 집 외아들이 처녀를 발견하고 자기 방에 데리고 들어가 숨겨 놓고 보살핀다. 마치 아기를 보살피듯 먹여주고, 씻겨주고 하면서. 오랜만에 처녀에게도 행복이 찾아온 셈이다. 남자의 어머니에게 곧 들키긴 하지만 인자한 어머니는 처녀를 아들과 혼례를 시켜준다. 아이도 갖게 된다.

그러나 행복은 여기까지였다. 남편이 과거를 하러 가고, 그 사이 색시는 아이를 낳는데 이 소식을 전하려 시어머니는 하인을 통해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그 편지가 잘못되고 만다. 하인이 심부름 가며 묵은 집은 하필 색시의 친정집(혹은 주막 주인이 계모)이었다. 계모는 하인과 이야기를 나누다 전실 딸의 소식을 알게 됐고, 편지를 바꿔치기 한다.

편지 바꿔치기는 옛이야기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화소다. 편지 바꿔치기는 편지를 쓴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사건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간다. 잘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은 흥측한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으로 전달되고,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내쫓지 말고 기다리라는 소식은 당장 내쫓으라는 소식으로 전달된다. 결국 색시는 시댁에서도 다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하인이 친정집에 묵은 걸 한탄해야 할까, 아님 간악한 계모를 탓해야 할까? 그러나 어쩌면 편지 바꿔치기는 진짜 편지가 바꿔치기 당한 것이 아니라 남편과 공간적 거리가 멀어진 만큼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면서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척하면 척하는 사이라도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상대의 말을 왜곡해 받아들이게 된다.

과거를 하러 간다는 건 그저 시험만 뚝딱 보고 오는 게 아니다. 서울까지 오고 가는데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과거 시험 전 적응하며 지내는 시간이며, 합격자 발표도 봐야 하고 해서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두 사람의 심리적 거리는 멀어진다.

어쩌면 색시는 아이를 낳으며 자신의 여성성을 찾을 계기를 마련하게 됐으나, 남편은 여전히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아이처럼 보살펴야만 했던 색시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색시는 또다시 쫓겨났다. 이번엔 아이와 함께다. 정처 없이 이집 저집을 다니며 겨우겨우 지내다 어느 곳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샘에 허리를 구부리다 그만 등에 업힌 아이가 빠진다. 순간 색시가 얼마나 철렁했겠는가! 색시는 아이를 구하려 무작정 두 손을 내민다. 손이 없어 아이를 받지 못할 거란 생각 같은 건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샘에서 잘려진 두 팔이 나와 팔뚝에 붙는다.

()은 재생의 힘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이 세상 생명의 시작이 물에서 시작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물은 모든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그리고 물은 여성의 생명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색시는 손을 찾았다. 손이 여성성을 뜻하는 것이었다면 손이 잘린 것은 진짜 손이 잘린 것이 아니라 여성성이 발현되기 이전의 시기로 퇴행한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손이 다시 붙은 것은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색시가 자신이 잃어버렸던 여성성을 찾은 것이라 볼 수 있다. , 색시는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한편 남편은 과거에서 돌아온 뒤 색시가 사라진 것을 안다. 편지 내용이 어찌하여 그리됐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그리고 색시를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선다. 귀한 외동아들이었던 남편은 엿장사 혹은 바디장사가 되어 돌아다닌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만난다. 서로 분명 색시인데 손이 있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고, 분명 신랑인데 초라한 행색의 장사꾼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지만 결국 서로를 알아본다. 아이가 그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다.

서로 멀어졌던 두 사람은 색시가 여성성을 되찾고, 남편이 자신이 누렸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난 뒤에야 행복을 맞이할 수 있었다.

 

여성이 여성을 구원하리라.

이야기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색시가 다시 손을 찾은 건 여성인 자신의 모성 덕분이기도 했지만, 이 이야기에는 색시를 돕는 여러 여성의 모습이 나온다. 시어머니, 길에서 물을 떠주는 여인들, 다시 손이 붙고 난 뒤에 색시를 받아들여준 주막집 여인이나 모두 여성들이다. 여성은 여성을 통해서만 구원받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물론 오갈데 없는 색시를 받아준 남편도 고맙다. 하지만 색시를 아이처럼 다루는 모습에선 소아성애자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만일 편지 바꿔치기 같은 것이 없었다면 색시와 남편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이를 낳으며 여성성을 찾을 계기를 마련한 색시와, 여전히 색시를 소아성애의 대상으로 삼는 남편 사이가 원만할 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남편이 색시를 찾아 돌아다니는 과정은 남편의 성장과정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여성성을 가진 색시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여성만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도 구원하는 힘이 있는 존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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