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
‘신돌이, 선돌이, 부돌이’, ‘세 글동무’, ‘세 학우’, ‘세 친구’ 이야기
1. 소원?
“네 소원은 뭐니?”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
하지만 자라서 이 질문에 답했던 그대로 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주 뚜렷한 소원을 갖고 있고, 또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경우는 자기가 원했던 소원을 이룰 수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흔치 않다. 무엇보다 질문을 받았을 때 한 가지 또렷한 소원만 갖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어린 시절엔 이런저런 가능성에 대해 꿈을 꿀 수 있고, 질문을 받았을 땐 그 가운데, 그 순간 좀 더 끌리는 것으로 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또 소원(꿈)은 자라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2. 옛이야기 ‘신돌이, 선돌이, 부돌이’
어린이 책에서 ‘신돌이, 선돌이, 부돌이’로 알려진 옛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자신이 가르치던 세 아이에게 물었다.
“네 소원은 무엇이냐?”
아이들은 차례로 대답했다.
“저는 신선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이름난 선비가 되고 싶습니다.”
“저는 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라서 자기가 원했던 대로 된다. 그래서 제목도 ‘신돌이, 선돌이, 부돌이’다.
선비가 되고 싶던 아이는 평양감사가 되어 길을 가던 중에 신선이 된 친구가 사는 곳에 들른다. 그곳은 동서남북의 창문을 열 때마다 봄여름가을겨울의 풍경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부자가 되고 싶던 친구도 함께 만난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싶던 친구는 구렁이가 되어 있었다.
평양감사는 신선에게 말한다. 친구를 구렁이로 둘 수는 없지 않겠냐고.
신선이 답했다. 그럼 저 친구에게 복숭아를 따 오라고 해보자고.
구렁이는 네 개의 복숭아 가운데 하나는 자기가 먹고 세 개를 가지고 돌아왔다.
신선이 말했다. 이 친구는 욕심이 너무 많아 사람 노릇을 할 수 없어서 구렁이가 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
평양감사는 신선에게 작별하고 돌아온다. 그런데 와 보니 이미 세상은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3.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이야기가 조금은 도식적이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야기를 읽다 보면 결국엔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런데 가만 생각하니 내 마음엔 신선이 되고 싶은 마음, 이름난 선비가 되고 싶은 마음,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모두 있는 것 같다.
신선은 현실을 초월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불멸의 존재다. 늘 신선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의 문제나 현실의 괴로움이 닥칠 때면 신선처럼 초월적인 존재에 마음이 끌리기도 한다.
선비는 학문을 갈고 닦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관직에 나아간다. 관직에 나아간다는 것은 지금껏 갈고 닦은 학문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공평무사하게 다스리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서 선비가 평양감사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요즘으로 말하면 우리가 학교 공부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야 한다’는 말은 어쩌면 이런 의미와도 통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거창한 걸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누구나 한 번쯤은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봤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신선이나 선비도 좋지만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가장 클지도 모른다. 이는 나뿐이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옛날이야기의 마무리가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말로 끝날 정도로, 사람들은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물론 부자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르니 획일화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건 부자가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4. 이야기가 하고 싶은 말
이야기에서 세 친구가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건 감사 덕분이었다. 감사는 평양감사로 부임하는 길에 신선이 사는 곳을 찾아간다. 그리고 신선에게 부자가 되고 싶었던 친구도 만나고 싶다 말한다. 부자가 되고 싶었던 친구는 구렁이가 되어 있었고, 감사는 구렁이가 된 친구가 다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즉, 이야기의 중심은 감사에게 맞춰있다.
하지만 부자가 되고 싶었던 친구는 다시 사람이 되지 못한다. 신선은 구렁이가 다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복숭아를 따오라고 시험을 하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의 몫을 우선 챙기며 부자를 꿈꿨던 친구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해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
아마 감사는 구렁이가 된 친구를 보며 자신을 우선 챙기려는 욕심이 화를 불어온다는 것을 깨우쳤을 것이다.
가장 의미심장했던 장면은 감사가 신선과 헤어져서 바깥세상으로 나와 보니 이미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던 것이다. ‘신선놀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말이 생각나는 지점이다.
신선이 사는 곳은 인간 세상과 다른 세상이기에 시간의 흐름도 인간 세상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신선이 동서남북의 창을 열 때 신선이 있는 곳은 그대로지만, 창문 밖 인간 세상의 계절은 바뀐다. 사람들이 밭을 갈던 장면은 어느새 곡식이 익어가는 장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렇듯 서로 다른 시간의 흐름을 갖고 있으니 선비가 신선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구렁이가 된 친구를 시험하고 하는 동안에도 인간 세상의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가고 있던 거다.
흔히 신선들이 사는 세상을 이상향처럼 여기기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곳은 죽음과 같은 공간이기도 하다. 그곳은 인간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시간도 멈추어 있다. 따라서 신선들은 더는 늙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 세상에서 선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그곳을 나와야만 한다.
이야기에 따라 신선이 선비에게 벌레가 있는 술을 마시게 하는 화소가 있는 경우도 있다. 이야기에서 선비는 벌레가 있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데, 만약 그 술을 마셨다면 선비도 신선이 됐을 거라고 한다.
하지만 아마도 선비는 자신이 신선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을 공평하게 다스려야 하는 그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신선 세계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신선의 세상이란 인간들의 삶을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창밖의 풍경처럼 여기는 곳이기 때문이다.
5. 내 중심을 잡는다는 것
이야기에서는 세 친구의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결국에 세 친구는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속에 있는 여러 모습들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간다는 건 내 마음속 여러 모습을 서로 통합하고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감사가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건 이 때문이다.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이가 사람이기에 민담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신선이 하늘이고, 부자가 땅이라 할 때, 선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사는 사람이다. 때로는 하늘의 뜻을 찾고, 때로는 땅의 기운과 부를 탐하지만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감사가 평양감사로 내려가는 길에 세 친구를 만났던 건 감사로서 공평무사하게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자기점검 시간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세 친구를 만나는 과정은 감사로 가기 전이 아니라 평양감사로 일하던 시절일 것 같기도 하다. 즉 감사는 일을 할 때 신선처럼 백성들을 창밖의 풍경처럼 여기기도 하고, 욕심 많은 부자를 측은히 여기기도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중심을 제대로 잡게 된 것은 평양감사의 지위를 내려놓고 난 뒤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나왔을 때 세상은 이미 수백 년이 지나 있었다는 것은, 감사의 깨달음이 그만큼 늦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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