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전후 - 책, 온몸으로 느끼기]
좋은 기억이 감수성을 키운다
“또? 또 읽으라고? 그래, 읽자.”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하루에도 수십 번씩이나 읽었던 책이 있습니다. 바로 《달님 안녕》(하야시 아키코 글, 그림/한림출판사)이지요. 아마 대충 어림잡아도 천 번 이상은 읽었을 거예요. 하루에 열 번씩 5개월 동안 봤다고 쳐도 1,500번이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 이상 본 게 틀림없어요.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됐어요. 늘 방바닥에 놓여 있어도 본척만척했는데, 15개월쯤 된 어느 날 갑자기 이 책을 가져오더니 그 다음부터 손에서 놓질 않았죠.
날이 어두워지면서 지붕 위로 달이 떠오르는 과정을 숨죽인 듯 지켜보다가, 구름에 달님 얼굴이 가릴 때면 안타까워 어쩔 줄을 모르다가, 구름이 걷히고 다시 달님 얼굴이 나오면 좋아서 팔짝팔짝 뛰곤 했어요.
그러다 하루는 집 밖으로 나와서 달님을 보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죠. 검게 윤곽만 드러난 작은 모습이지만 달님을 바라보는 사람과 지붕 위에 있는 고양이 모습이 가슴에 다가왔나 봐요. 아이는 밖에만 나가면 달님을 찾게 됐어요. 만약 달님이 구름에 가려 있기라도 하면 책에서처럼 이렇게 외치곤 했죠.
“구름 아저씨, 비켜주세요. 달님 얼굴이 안 보여요.”
덕분에 한동안 어둑어둑해질 무렵 산책 나가는 게 하루 일과가 됐지요. 이 산책은 아이에겐 굉장한 경험이었어요. 다들 아시잖아요? 달님 얼굴이 날마다 바뀌는 것 말이에요. 아이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달님 얼굴이 날마다 바뀐다는 사실을 눈치챘지요. 그리고 그 사실에 열광했고요. 다시 동그란 달님이 될 때는 그 어느 때보다 기뻐했죠.
“달 달 무슨 달, 쟁반같이 둥근 달…….”
전 나름대로 신나게 달 노래를 불러줬지만 둥근 쟁반 대신 네모난 쟁반만 봤던 아이한테는 별로 다가가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신 아이는 달님을 보며 수박을 생각했답니다. 둥그런 수박, 반달 모양으로 자른 수박, 그 수박을 먹어서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수박……. 이렇게 말이에요.
아이는 이 책을 다섯 살 무렵까지도 꾸준히 보곤 했어요. 그러더니 어느 날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어요. 이 책을 갑작스럽게 보기 시작했듯이, 이 책을 더 이상 안 보게 된 것도 갑작스러워서 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무렵 이 책을 보여주며 물었죠.
“이 책 기억나니? 네가 아기 때 가장 좋아하던 책인데.”
아이는 이 책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어요. 저는 그 사실이 조금 당황스러웠죠. 그래서 책 속의 내용을 그대로 읽어줬죠. 그랬더니 좀 전까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던 아이가 책을 그대로 따라서 외웠어요. 책은 기억 안 나는데 내용은 기억이 난다면서요. 책은 아이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그 책의 내용과 느낌만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거지요.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아이는 달님을 아주 좋아해요. 날마다 바뀌는 달님의 모습과 색깔을 보며 ‘너무 예쁘다’며 감탄사를 연발하곤 해요. 그럴 때마다 저는 《달님 안녕》을 다시 떠올리죠. 아무래도 이 책이 없었다면 아이가 달님을 이렇게 좋아하게 되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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