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아이들의 일상사 엿보기
《존경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로라 에이미 슐리츠 글/로버트 버드 그림/시공주니어/2009년)
나는 중세 유럽의 장원제도에 대해서 별반 아는 게 없다. 물론 별 관심도 없다. 유럽의 중세란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것에 불과했다.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 책은 어찌 보면 낯설기 그지없다. 중세 유럽의 장원이라는 내용도 그렇지만 그 내용을 풀어나가는 형식도 그렇다. 연극 공연을 위한 희곡, 이것이 바로 이 책의 형식이다. 그것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대사와 지문으로 이루어진 희곡이 아니다. 이 책은 19편의 독백극과 2편의 대화극으로 이루어져있다. 한 사람이 나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독백처럼 자기 이야기를 하는 독백극과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독특한 희곡이다. 희곡은 각 편마다 독립적이어서 어느 것을 먼저 읽던 상관없지만, 동시에 21편의 희곡들이 모여서 다시 한 편의 희곡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처음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을 결심을 하기까지는 약간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금방 빠져든다. 각 희곡은 평균 3-4쪽 분량 정도로 짧아서 부담이 없는데다, 21편의 희곡 가운데 자기가 관심 있는 걸 얼마든지 골라볼 수 있는 자유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 페낙이 『소설처럼』(문학과지성사)에서 밝힌 책에 관한 독자의 열 가지 권리 가운데 ‘건너뛰며 읽을 권리’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군데군데 골라 읽을 권리’를 얼마든지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는 책이라고나 할까?
독립적인 21편의 희곡을 하나로 묶어 주는 건 이 작품의 배경인 1255년 영국의 한 장원이다. 장원은 중세 현실 생활을 묶어주는 하나의 단위다. 각각의 장원은 그 속에서 하나의 자급자족 사회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지금으로 보면 하나의 촌락 단위라 할 수 있지만 그 속에서 영주는 마치 왕처럼 모든 권리를 스스로 행사한다.
장원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 저마다 신분에 따라, 하는 일에 따라 생활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서로 분리되어 자신의 생활에만 충실한 듯싶지만 결국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 책은 바로 이 지점에서 그 매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9편의 희곡은 장원이라는 공간에서 생활하지만 서로 위치와 처지가 다른 아이들을 한 명씩 등장시켜 자신의 이야기를 독백으로 내뱉는다. 독백은 내뱉는 사람의 처지와 감정이 가장 솔직하게 나오는 대사다. 그래서 누군가의 독백을 듣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과 감정을 비롯한 내면세계를 단숨에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독백극은 그 효과가 남다르다. 비록 짧은 분량이고, 등장인물에 대한 정보나 사건은 간단하지만 각각의 인물이 처해있는 상황이나 감정을 독자에게 강렬한 이미지로 남긴다. 마치 자신이 중세의 장원에서 생활하는 등장인물이 된 듯한 느낌을 전해준다. 재미있는 건 이렇게 한 인물에 빠져들자마자 이어서 나오는 전혀 다른 성격의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독백극의 성격상 새로운 등장인물에도 쉽게 동일시할 수 있다 점이다.
때로는 이어서 나오는 두 인물이 서로 사소한 사건 하나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냥을 즐기는 영주의 조카 휴고의 모습은 뒤이어 나오는 대장장이의 딸 타갓의 모습과 대비되어 서로 다른 신분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게다가 타갓은 남들과 다른 외모(거인) 때문에 더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남모르게 휴고를 짝사랑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이는 두 사람의 넘을 수 없는 벽인 동시에 독자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런 모습은 ‘농노의 딸 모그’, ‘방앗간 주인의 아들 오토’, ‘얼뜨기 잭’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세 편의 이야기는 세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서로 얽혀있는데, 이는 세 사람의 삶을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한다. 어쩔 수 없이 영주의 방앗간에서 곡식을 갈아야만 하는 농노의 딸 모그의 분노, 농부들의 곡식을 갈면서 밀가루를 석회 가루로 바꿔치기 하곤 해서 농부들의 미움을 사는 방앗간 주인과 이 때문에 농부의 아이들과 놀고 싶어도 놀지 못하는 방앗간 주인의 아들 오토의 외로움, 사람들한테 얼뜨기라고 놀림을 받곤 하는 잭이 어느 날 오토가 아이들한테 돌을 맞고 쭈그리고 앉아 우는 모습을 보고 위로해주면서 친구가 되는 장면은 세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주면서 당시의 분위기를 보다 잘 느끼게 해 준다.
대화극에서도 이런 묘미는 잘 발휘된다. ‘전당포집 주인의 아들 제이컵 벤 살로몬과 상인의 딸 페트로넬라’의 대화극은 그 어떤 글보다 유대인의 처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대화극이라고는 하지만 실제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는 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두 사람의 독백이 서로 번갈아가면서 대화처럼 오고간다. 물을 뜨러 개울에 나온 두 아이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본다. 먼저 전당포집 아들 제이컵이 자신과 가족이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죄를 뒤집어쓰고 이곳까지 오게 된 사정을 읊는다. 여기에는 십자군 전쟁으로 상징되는 중세의 기독교 분위기 속에서 유대인들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는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리고 맞은편 냇가에 기독교인 페트로넬라가 나타난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냇가를 가운데 두고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페트로넬라가 돌을 집어든 것으로 절정에 다다랐던 긴장감은 그 돌이 제이컵이 아닌 물 위로 향하면서 단번에 해소된다. 아이들이 아니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해소다. 물론 종소리가 울리면서 두 아이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두 아이가 함께 노는 모습에는 가슴 뭉클함이 있다. 작가가 뚜렷한 자기 생각이 있지 않았다면 이런 장면을 만들어내진 못했으리라 여겨진다.
이처럼 이 책은 여러 등장인물들의 독백극과 등장인물들 간에 스치듯 연결되는 이야기 구조를 통해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1255년 중세 영국의 장원 모습을 눈앞에 펼쳐준다. 별다른 설명글이 없으면서도 중세의 다양한 계층 아이들이 살아가는 일상적인 모습을 그 어느 책보다 충실하게 담아내고 있고, 그 결과 중세의 아이들은 마치 지금 아이들의 모습처럼 아주 생생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역사가 죽은 사람들에 관한 따분한 이야기가 아니라 생존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아이들도 알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작가의 이런 바람은 충분히 채워진 듯싶다. 돌려짓기나 상속법 같은 따분한 말도 이 책을 읽고 나면 굶주린 농부들에게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246호(2009년 4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어린이책 관련 > 논픽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래가 온다 바이러스>, <바이러스 빌리> (0) | 2020.08.07 |
---|---|
《킁킁! 쓰레기통에서 찾은 역사》(미르코 마셀리 글, 그림/다림) (0) | 2020.06.03 |
<나의 과학 - 시간>, <딸꾹질 한 번에 1초 : 시간이란 무엇일까?>, <시간이 보이니?> (0) | 2020.01.29 |
크게 작게 소곤소곤 (0) | 2019.12.02 |
<세계 시민 수업 1, 난민> <난민 이야기> (0) | 2019.10.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