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이처럼, 다현이처럼
《벽이》(공진하 글/오승민 그림/낮은산/2005년)
벽이
벽이는 주인공 재현이가 맘 놓고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대다. 다른 사람에게는 할 말이 나오지 않고 더듬거리게 되지만, 벽이한테 이야기할 때면 막힘 없이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벽이는 재현이가 말을 더듬거려도 참고 기다려주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 듣겠어. 급한 거 아니지? 그럼 나중에 얘기하자.” 하고 답답해할 때도 벽이는 재현이의 말문이 다시 터질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려준다. 덕분에 재현이는 벽이한테 말을 할 때만큼은 마음이 편해진다. 마음이 편해지니 말도 잘 나온다. 이렇게 재현이는 벽이랑 친구가 된다.
그런데 벽이가 누군지 아는 순간 그만 가슴이 답답해진다. 벽이는 다름 아닌 재현이 방 한쪽의 빈 벽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말하는 게 더 편했던 재현이는 벽을 보고 말하게 됐고, 결국 볼록하게 만져지는 벽지 속 사내아이에게 아예 ‘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다현이
재현이랑 다현이는 쌍둥이다. 쌍둥이라면 뭔가 통하는 게 많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일단 재현이랑 다현이는 성별이 다르다. 재현이는 남자, 다현이는 여자다. 그래도 쌍둥이니 비슷한 게 많겠지만 다섯 살 때 심한 열병을 앓고 난 뒤 둘의 운명(!)은 바뀌고 만다. 두 아이 똑같이 병을 앓았지만 다현이는 금세 나아서 퇴원을 했지만 재현이는 ‘몸 속에 누군가 들어와서 훼방을 놓는 것’처럼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여섯 해가 지났지만 몸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재현이와 다현이의 운명은 갈라진다.
책의 앞부분엔 다현이의 생일 잔치 장면이 나온다. 겨우 삼분 차이 나는 쌍둥이니 생일도 똑같은 게 뻔한데 생일 잔치는 다현이를 위해서만 차려진다. 다현이만을 위한 생일 잔치라는 게 속상하기도 한데다, 다현이가 재현이를 아기 다루듯 세수를 씻기거나, 선물을 나눠줄 테니 좀 참아달라고 하는 장면에선 정말 얄미워지기까지 한다. 똑같은 생일인데도 밖에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방안에서 벽을 들여다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재현이 생각은 해주지도 않는 것만 같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다현이의 모습이 새롭게 보인다. 생일 잔치가 끝나고 돌아가는 친구들을 향해서 “우리 오빠한테 인사하고 가야지.” 하고 말할 수 있고, 오빠가 오줌을 싼 것을 알게 되었을 때도 “야, 그냥 가자. 히히……. 우리 오빠가 실수를 좀 해서 지금 니들 인사받을 처지가 아니거든.” 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수 있는 힘 때문이다. 다현이 마음 속에는 비록 재현이를 세심하게 배려할 수 있는 힘까지는 아니라도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래서 괜히 위선을 보이기 보다는 재현이를 자기가 있는 세계로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벽이가 찢겨져 떨어졌을 때 다현이의 행동은 그걸 잘 보여준다. 어쩔 줄 몰라 울음을 터트린 재현이를 위해 찢겨 나간 벽이를 어떻게든 해 보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자 대뜸 벽이를 자기 이마에 갖다 대고 말한다. 벽 보고 얘기하면 말 잘하지 않냐고, 벽이가 여기 있으니 자기를 벽이라고 생각하고 말해 보라고 말이다. 말하기 불편한 재현이를 도와준다고 할 말을 다 해주고 마는 엄마와는 다르다. 결국 재현이는 엄마에게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다 해내고야 만다.
엄마
엄마는 몸이 불편한 재현이를 위해서 큰방에 재현이만을 위해 컴퓨터며 책꽂이며 모든 걸 준비해 놓았다. 밖에 나가지 않고도 방안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사실 알고 보면 다현이도 처음으로 하는 생일 잔치다. 엄마가 재현이 때문에 생일 잔치를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이번 생일 잔치도 수학경시대회에서 전교 일 등을 한 덕분에 겨우 할 수 있었다.
재현이는 학교에 다닐 때도 엄마 등에 업혀서 다닌다. 엄마는 재현이를 따라다니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준다. 그러다 보니 재현이는 엄마가 하기 힘든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미술관 가기, 박물관 가기, 놀이공원 가기……. 학교에서 재미난 숙제를 내주긴 해도 재현이는 숙제를 할 도리가 없다. 엄마가 데리고 갈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방학을 맞은 재현이에게 선생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숙제를 내줬다. 하지만 재현이는 휴가를 가는 가족들을 따라갈 수도 없었고, 극장에도 갈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재현이를 지키는 게 최선이라고만 믿는다. 그래서 학교에서 재현이가 전동휠체어를 배워 밖에 타고 다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오로지 재현이가 전동휠체어를 타는 게 위험할 수 있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재현이가 자기 혼자의 힘으로 어딘가 움직일 수 있다는 기쁨을 맛보고 있다는 사실은 엄마에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것보다는 재현이가 전동휠체어를 타고 밖을 다닐 때 다른 사람이 보는 눈초리가 더 신경이 쓰인다.
엄마가 바라는 건 재현이가 열병을 앓기 전처럼 튼튼해지는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가족사진도 찍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가족사진처럼, 재현이가 아프기 전의 상태로 멈춰버린 꼴이 되고 만다.
재현이가 다시 건강해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속으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재현이를 감싸안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의 태도야말로 재현이를 무능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공진하
공진하는 특수학교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다. 그건 공진하의 작품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걸 뜻한다. 이 책이 감동을 주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을 아주 현실감 있게 보여준다. 그래서 벽을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재현이의 모습 한 장면만으로도 독자들은 그 속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누구라도 재현이의 처지에 공감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장애가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다룬 책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대개는 장애가 있는 아이 역시도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거나, 혹은 주위의 누군가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고 이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는 식의 안이한 결론에 그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재현이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해 주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 다가오게 한다.
방안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던 재현이가 벽이를 보고 하고 싶은 말을 했듯이, 우리도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함께 웃고 울 수 있는 준비를 해야하는 건 아닐까?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 통권 168호(2006년 1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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