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할미가 일깨워준 것
《우리 집에 온 마고할미》(유은실 글/전종문 그림/바람의아이들/2005년/절판)
《우리 집에 온 마고할미》(유은실 글/백대승 그림/푸른숲주니어/2015년/재출간)
올 한 해는 참으로 기분 좋다. 눈에 띄는 좋은 작품, 기대되는 신인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벌써부터 2005년 결산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좀 쑥스러워진다. 하지만 조금 이르면 어떠랴. 작가 유은실은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도 이미 2005년 한 해 동안 충분히 그 빛을 발하고 있으니 전혀 거리낄 게 없다.
유은실은 2005년 벽두에 첫 작품인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창비) 출간하며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몇 달 뒤 『우리 집에 온 마고 할미』(바람의아이들)라는 작품으로 다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줬다. 두 작품은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한편으론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그건 두 작품 모두 그 속에서 또 다른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점이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은 린드그렌의 작품을 새롭게 즐기면서 빠져들을 수 있게 했고, 『우리 집에 온 마고 할미』는 우리 옛이야기를 지금 현실의 세계에서 다시 되새겨보게 했다.
그런데 난 어쩐지 두 작품 가운데 『우리 집에 온 마고 할미』쪽에 좀더 마음이 끌린다. 첫 문장부터가 예사롭지가 않고, 결국 마고할미의 독특한 캐릭터로 빨려들어가게 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나서는 마고할미를 떠올릴 때마다 이런 저런 새로운 생각이 더해진다. 아무래도 마고할미는 ‘우리 집’으로도 찾아와 심통(?)을 부리고 있는 듯하다.
도우미 할머니가 오셨다.
아빠보다 키가 크고
발도 커다란 할머니가
큰 가방을 들고
우리 집에 나타났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마치 시처럼 행갈이를 해놓았다. 하지만 전체가 다 이렇게 쓰여진 건 아니다. 작품 중간 중간,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만 이런 식으로 행갈이를 해 놓았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런 식의 행갈이는 작품의 화자인 ‘나’가 할머니를 놀랍고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는 경우에만 나타난다. 덕분에 할머니의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할머니가 진짜로 마고할미인지는 알 수 없다. 화자인 ‘나’ 역시도 처음부터 할머니가 마고할미라고 확신을 하는 건 아니다. 『마고할미』 책을 보고, 할머니랑 같이 별을 보던 날, 마고할미란 말만 듣고도 화를 내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나’는 할머니가 마고할미임을 확신한다.
‘나’가 할머니를 마고할미로 받아들이던 날, 그 날은 마고할미가 ‘나’에게 우리 옛이야기 속의 인물을 새롭게 불러낸 날이기도 하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는 이야기는 책에서는 보지 못한 내용이 덧붙여 있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아직까지도 티격태격 싸우느라고 꼭 따로 나온다거나, 옥황상제가 견우직녀에게 벌을 내리자 직녀 친구들이 옥황상제님이 견우 대신 밭을 갈아주고 또 장롱 속에서 옷감을 꺼내 나눠주라고 항의를 했다거나, 선녀 엄마 따라 두레박 타고 하늘로 올라간 애들이 외할아버지한테 ‘납치범의 자식들’이라며 구박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조금 황당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가만 보면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는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작가가 긴지민지모를 마고할미를 등장시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작품에서 마고할미란 어떤 존재일까가 궁금해진다.
마고할미는 원래 하늘을 열고, 강바닥을 손으로 죽죽 긁어서 산을 만들었던 거인이다. 하지만 우리 집에 온 할머니는 마고할미랑 견줄수도 없을만큼 작게 조그라들어 있다. 아빠보다 키가 크고 발도 커다랗긴 해도 결국 보통 사람 수준일뿐이다. 그럼 도대체 마고할미는 왜 이렇게 작은 모습으로 이 집에 나타나게 된 걸까?
‘나’의 집 분위기를 잠깐 보자. 집안 살림은 오랫동안 아빠가 맡았다. 아빠는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엄마가 돈을 벌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빠가 공무원 시험에 붙어 동사무소에 다니지만 엄마는 너무 바빴기 때문에 집안 일은 여전히 아빠가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빠는 점차 집안일을 싫어한다. 와이셔츠를 잘 다려서 속상해진다. 엄마 아빠는 분위기가 심각해지고 만다.
사실 이 작품에는 집안의 모습은 최소한으로만 보여줄 뿐 겉으로 많이 드러내지는 않는다. 이 작품에서도 마치 배경처럼 살짝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서술이지만 미루어 짐작하건데 마고할미가 등장하는 바로 그 시기는 집안의 중심이었던 엄마의 위치가 흔들리는 때였다. 이전까지 엄마는 집안 경제를 책임지는 사람으로, 또 아이와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으로 집안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공무원이 되어서 경제활동을 하게 되면서 점차 집안 일을 잘 한다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와이셔츠를 잘 다려서 속상하다는 말은 그 반증이고 말이다.
바로 이 순간에 등장한 게 마고할미다. 마고할미는 한순간에 엄마 아빠의 갈등의 원인을 해소해준다. 만약 마고할미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집안은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할 수 있다. 엄마 아빠가 헤어지지 않는 이상 엄마는 결국 일을 포기하고 집안 사림을 해야 했을 것이다. 엄마의 직업이 ‘결혼 기획 전문가’라는 점을 생각할 때 엄마가 일을 위해서 헤어지지는 못할 거라는 걸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고할미는 집안에서 쪼그라들 수밖에 없는 엄마를 구해주려고 나타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마고할미는 옛날엔 하늘까지 닿는 거인이었던 자신이 조그라든 현실을 더 이상 반복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책을 덮으면 조금 괴팍스럽긴 해도 당당한 마고할미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그려진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여성의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봐도 좋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마고할미가 들려준 ‘견우직녀’ ‘나무꾼과 선녀’ 역시도 마찬가지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게 확실해진다.
우리 집에 왔던 마고할미는 떠난다. ‘나’가 할머니가 보지 말라고 했던 방안을 봤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하지만 할머니가 쓰던 방 한가운데서 주운 흰 머리카락 한 올이 ‘나’에게 남아있는 한 마고할미는 아주 떠난 건 아닐 것이다.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31호(2005년 10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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