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수호유령이 필요하다
《수호유령이 내게로 왔어》(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글/풀빛/2005년)
어느 날, 열한 살짜리 겁쟁이 소녀 나스티에게 수호유령이 찾아왔다.
그런데 수호천사가 아니라 수호유령이라니? 조금 황당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일을 천사만 하리란 법도 없다. 수호유령의 말처럼 ‘천사든 유령이든, 중요한 것은 그 앞에 수호라는 말이 붙는다는 거’라고 할 수 있으니까.
수호유령 로자 니들
수호유령의 이름은 로자 니들이다. 로자 리들이 정신을 집중해 몇 초간 겨우 보여준 모습은 역시 천사와는 거리가 있다. 늙고 뚱뚱한 나이든 동네 아주머니 모습일 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1945년 폭탄이 떨어져 어느 집 지하실에 2년이 넘게 파묻히고 난 뒤부터는 날지도 못하고 몸의 신축성을 잃어버려 열쇠구멍으로 들어가거나 하는 일은 할 수가 없다. 움직여야 할 때는 불편한 평발을 질질 끌면서 돌아다니게 되었단다. 어찌 보면 유령답지 않은 유령이 되었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로자 니들은 어떻게 해서 유령이 된 걸까?
로자 니들은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에서 정권을 잡게 된 해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구해주러 달려가다 전차에 치여 죽는다. 하지만 절실하게 뭔가 할 일이 있고, 분노와 노여움에 차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죽지 못하고 유령이 되고 만다. 살아서 유령을 믿지 않았고 유령이 된 게 좋지만은 않지만 그래도 ‘유럽 전체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노동자 유령’임을 자부한다.
이쯤 되면 로자 리들의 모습은 더 이상 가볍게 웃고 넘어갈 수가 없다. 지나간 1938년의 역사는 어느새 나스티의 현실이 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과거와 현재의 관계 맺기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도 있다. 그건 나스티가 살고 있는 다세대 주택의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로자 니들과 관련을 갖고 있다는 점하고도 관계가 있다. 나스티의 옆집인 티나네 집은 로자 리들이 살던 집이고 말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란 단순히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로자 리들이 죽은 1938년, 로자 리들이 나스티의 수호유령이 된 1978년, 이 작품이 쓰여진 1998년. 연도는 다르지만 로자 리들의 의미가 그대로 이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로자 니들은 어떻게 나스티의 수호유령이 되었나?
로자 니들은 정의로운 사람이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한다. 그래서 유령이 되기도 했지만 유령이 된 뒤에도 이 다세대 주택에서 정의를 찾아볼 수 있도록 잼과 베이컨과 달걀을 이리저리 나르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곤 했다. 그리고 겁쟁이 나스티가 절실하게 수호천사를 필요로 하자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스티는 자기를 도와주는 수호유령인 로자 니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해진다. 티나가 자신을 치려는 순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 주기도 하고, 엄마 아빠가 저녁에 외출했을 때도 함께 이야기를 나눠주기도 한다. 뜨개질이라든지 혹은 작문 숙제를 하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뿐이 아니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개가 다가와서 나스티의 다리를 핥고 있을 때도 로자 리들 덕에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로자 리들은 차츰 나스티만의 수호유령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 시작은 엄마와 아빠다. 그리고 이후 친구 티나에게도 로자 리들에 대해 고백을 한다. 엄마 아빠가 로자 리들을 알게 된 계기가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었다면, 티나에게 고백하게 된 건 나스티의 선택이었다. 이는 나스티가 로자 리들로부터 벗어나 서서히 혼자 일어서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로자 리들의 가르침
로자 리들을 만난 나스티는 자존심만 세고 겁 많은 아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아니 이 보다 더 큰 변화가 나타난다. 로자 니들의 가르침을 현실에서 깨우치게 됐다고나 할까?
물론 이런 깨우침을 얻는데는 로자 니들이 써준 작문이 큰 몫을 했다. 로자 니들이 써준 작문에는 점잖지 못한 표현들이 있었고, 덕분에 모범생이던 나스티는 문제 학생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처한 위치가 달라지면 새로운 세상이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영어 시간이면 늘 A를 받는 나스티는 갑작스럽게 수업 시간에 영어 시험을 쳐서 곤란을 겪는 친구들을 위해 나서게 된다. 학교 교육법에 의하면 시험을 치려면 적어도 두 시간 전에 알려주어야 한다면서 말이다. 반장에게 그 말을 선생님한테 하라고 말하지만 반장은 거부한다. 부반장은 반장이 할 일이라며 모른 척하고 말이다. 나스티는 로자 리들이 늘 하던 말을 떠올린다.
“늘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걸 기다릴 수 없다! 세상의 대부분의 불행은 사람들이 입 다물고 구경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뭔가 하기를 기다리는데서 온다.”
나스티는 직접 일어나서 영어 선생님께 시험을 치면 안 된다고 말하고 투쟁(!)에 나선다. 나스티는 정의를 교실에서 실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의 수호유령에서 공동체의 수호유령으로
이제 로자 리들은 나스티만의 수호유령에서 학교의 수호유령이 된다. 이렇게 된 직접적인 사건은 로자 리들이 들어가 있던 파출리 향이 나는 상자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서다. 나스티는 로자 리들을 찾기 위해 소동을 벌이지만 로자 리들은 의외의 장소, 즉 학교에 와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곤란을 겪는 아이들을 돕기 시작한다.
나스티로서는 무척 서운한 일이다. 하지만 이미 로자 리들을 통해 변화한 나스티는 더 이상 ‘욕심쟁이 외동아이’로 투정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어쨌든 학교에서 정의를 실현나간다는 점에서 나스티와 로자 리들은 함께 하는 셈이고 말이다.
진지한 이야기, 재밌는 유머
수호유령 로자 리들 때문에 생기는 갖가지 소동, 자존심만 센 겁쟁이 외동아이 나스티의 고민, 단지 이야기가 여기까지였다면 이 책이 갖는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로자 리들이 갖고 있는 상징성만이 도드라졌다면 이 책의 재미는 형편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은 진지하면서도 유머를 잃지 않음으로써 감동과 재미를 동시에 주고 있다. 게다가 긴 여운과 생각거리까지.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로자 리들은 다시 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로자 리들이 다시 날 수 있게 된 건 왜였을까?
- 이 글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격주간으로 펴내는 《기획회의》21호(2005년 5월 20일)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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