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교포 소녀의 자아찾기
《바이 바이》(이경자 글/시모다 마사카츠 그림/우리교육)
이 책을 읽는 내내 두 사람의 이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한 사람은 바로 이 책을 쓴 작가 이경자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린다 수 박이다. 이경자는 재일교포 2세, 린다 수 박은 재미교포 2세다. 두 사람 모두 우리말이 아닌 일어와 영어로 동화를 썼고, 책은 우리말로 번역이 되어 출판됐다. 둘 사이에는 많은 부분 공통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을 읽고 나면 두 사람의 공통점은 어느새 차이점으로 바뀌고 만다. 두 사람은 동화를 쓰는 이유가 다르고, 그들의 뿌리인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고, 고민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경자의 작품에는 '뉴베리상' 같은 거창한 타이틀은 없다. 대신 작가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문제 의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작가가 서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이 책의 주인공인 가즈가 서 있는 곳이다. 그곳은 1960년대 초 일본이다. 폐가가 된 우체국 관사가 있고 좁다란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있는, 살아가기가 그다지 녹록치 않은 곳이다. 이 골목에는 가즈 아빠처럼 2차 세계대전 때 징용으로 끌려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조선인들이 많이 산다. 그들은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가즈짱, 스나짱, 준코라는 일본 이름으로 불리고 일본인과 함께 생활하지만 결코 일본인이 될 수 없다. 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도 취학통지서 같은 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열 네 살이 되면 열 손가락을 하나씩 굴려가며 지문을 찍고 외국인등록 증명서를 발급 받아야 한다. 이 증명서를 안 가지고 다니면 법률 위반으로 처벌을 받는다. 일단 일본에서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고, 다른 나라에 가고 싶어도 일본 정부가 허락을 해주지 않으면 갈 수가 없는 '126호 해당자'는 아버지 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대물림되고 마는 것이다.
'왜 나는 조선 사람인 걸까? 왜 나는 일본에 있는 걸까? 왜 우리들은 자기 나라에 자유로이 갈 수 없는 걸까? 왜?'
나는 내 나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습니다.
지금 일본에는 조국을 모르는 동포 어린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왜? 왜?' 하고 생각한 것처럼 지금도 역시 '왜? 왜?'하며 마음속으로 울고 웃는 어린이가 있습니다. 바로 내 옆에 사는 일본 어린이들에게, 또 바다 너머 사는 한국 어린이들에게 그것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동화를 쓰게 되었어요. 내 마음이 여러분에게 잘 전해지면 좋으련만…….
작가는 이처럼 '작가의 말'을 통해서 일본에서 일본 이름을 갖고 일본말을 쓰고 일본 사람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한편으론 결코 일본인이 될 수 없고 동시에 한국인이 될 수도 없는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재일 교포의 문제를 정면에서 던지고 있다.
그리고 그 문제를 작가의 눈이 아닌 단순하고 평범한 아이인 가즈의 눈을 통해서 바라본 일상을 통해서 전달하고 있다. 골목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언니, 조선인이라는 게 알려지는 걸 자신도 모르게 꺼려하는 가즈, 조선에서였다면 잘 만나지도 않을 정도로 먼 친척인 테츠히 로 아저씨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가는 아빠, 대를 잇고 싶어서 일본인 첩을 들이는 테츠히로 아저씨와 그 때문에 마음의 병을 얻은 하루코 아줌마, 호르몬야를 하는 집안 일을 돕느라 자꾸 결석을 하던 스나짱……. 가즈는 이들과 함께 이런저런 일상의 일들을 겪으며 훌쩍 성장한다. 그 결말은 '바이 바이'다. 그건 어제까지의 나와 작별하고 새로운 나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다.
다소 무거운 이야기지만 간결한 문체 덕분에 부담감 없이 쉽게 읽게 한다. 이건 이 책의 또다른 미덕이다. 간결한 문체는 일상의 여러 모습들을 한 곳에 머물게 하지 않고 빠르게 스치듯 지나간다. 어떤 상황이나 장면에서도 묘사글은 발견하기 어렵다. 대사든 감정이든 짧고 빠르게 마치 그냥 툭 뱉어놓듯이 지나간다.
아이고, 분해.
아이고, 분해.
남자들이 나간 골목길을 향해 엄마는 소금을 마구 뿌려댔다.
세무서에서 나온 밀주 단속원이 술을 쏟아버리고 떠난 뒤의 장면이다. 별다른 감정 표현 없이 '아이고, 분해'하는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끝이다. 하지만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가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온다. 보통 다른 작품 같으면 이렇게 주인공이 분하다고 생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그 분한 마음이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럴까? 단속 장면이 특별히 리얼했던 걸까? 하지만 그것 역시 아니다. 단속 장면을 다시 읽어봐도 그런 건 없다.
엄마가 놀라 순간적으로 남자들을 밀어냈다. 남자들은 거칠게 엄마를 뿌리치고 우르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부엌, 벽장, 선반, 그리고 우리들 방까지 들어와서 샅샅이 뒤졌다. 남자들은 말은 한마디도 안 했다.
일어난 사건을 그냥 간결하게 보여줄 뿐이다. 대신 사건을 보여줄 땐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 마치 옛날 이야기처럼 말이다. 옛날 이야기에서 감정은 묘사가 아니라 사건을 통해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는 법이다. 대신 사건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앞으로 쭉쭉 뻗어나간다. 물론 차이는 있다. 여기서 가즈는 분명하게 '아이고, 분해.'하고 자신의 분한 감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분하다는 감정을 말로 표현한다고 해서 독자가 그 감정을 똑같이 받아들일 수는 없는 법이다. 독자에게 분한 감정이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분하다는 말만 내뱉는 건 그야말로 생뚱맞은 일일 테니까.
그러고 보니 작가의 말이 다시 생각난다. 작가 부모님은 책을 못 읽어주시는 대신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다고 한다. 어릴 적 이야기도 있고 옛날 이야기도 있었지만 어떤 이야기든 말로 하는 이야기는 공통의 특징을 갖기 마련이다.
바로 이거였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1960년 일본의 재일동포의 삶이라는 주제는 결코 접근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이야기다. 하지만 이 작품은 책을 읽기 시작하면 바로 이야기에 빠져들어 갈 수 있다.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주인공 가즈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이 작품을 보며 정말 오랫동안 가슴이 따뜻했다. 자신의 삶을 토대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작가의 저력과 이를 다른 사람이 공감할 수 있게 하는 글의 구성과 문체가 갖는 힘 때문이다.
- 이 글은 2004년 11월 20일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펴내는 격주간지《기획회의》 9호 '분야별 전문가 리뷰'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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