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것에만 정신이 팔리면……
‘잊음이 심한 사람’, ‘정신없는 사람’ 이야기
1. 웃음과 공감, 그리고 위안이 있는 이야기
‘잊음이 심한 사람’ 혹은 ‘정신없는 사람’으로 알려진 옛이야기다. 얼마나 정신이 없냐 하면 걸어갈 때 담뱃대를 쥔 손이 뒤쪽으로 갈 때마다 “내 담뱃대 어디 갔나?”를 반복하며 길을 갈 정도다
주인공의 정신없음을 과장해 보여주는 방식은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그저 웃고 넘어갈 수만은 없다. 가만 생각하면 누구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뭔가를 잊고 정신없는 사람 마냥 굴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사람들은 자신의 잊음이 아무리 심해도 이야기 속 주인공과는 선을 긋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은 이야기 속 주인공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말이다.
이 이야기는 매력이 무궁무진하다. 이야기하는 화자나, 이야기를 듣는 청자 모두가 웃으면서 공감하고, 위안을 얻을 수 있다.
2. 이야기와 동작의 콜라보
이 이야기는 주인공의 과장된 정신없음이 재미를 주는 동시에 이야기의 서사가 자연스레 동작으로 표현되는 매력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이야기에 맞춰 자기도 모르게 손을 앞뒤로 흔들며 담뱃대를 찾는 흉내를 내고, 똥을 누고 일어나는 흉내를 내게 된다. 듣는 사람은 말로 듣는 이야기와 행동을 한꺼번에 보고 듣는 셈이다. 덕분에 이야기는 더 강렬하게 전달될 수밖에 없다. 마치 잊음이 심한 사람에게 자꾸 잊어먹지 말고 잘 기억하라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 이야기는 한번 듣고 나면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듯 하다. 늘 옛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우리 아이가 처음으로 스스로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나섰던 이야기도 바로 이 이야기다. 그것도 주인공 마냥 손을 앞뒤로 흔들어가며 담뱃대를 찾고, 똥 누는 시늉을 하면서 말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들려준 건 단 한 번뿐이었기 때문이다.
3. 우리를 정신없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이 이야기의 압권은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은 길에서 만난 중에게 같은 걸 묻고 또 묻는다. 주인공의 반복된 질문에 짜증이 난 중은 이 사람을 골탕 먹이기로 한다. 함께 들어간 주막에서 중은 주인공이 잠든 사이에 머리를 빡빡 밀어버리고, 자기가 입었던 장삼을 벗어 입힌다. 그리고 주인공의 두루마기랑 갓을 들고 도망친다.
아침에 잠에서 깬 주인공은 거울을 보고(혹은 세숫물에 비친 모습을 보거나 머리를 만져보고)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 있을까?”
아무리 잊음이 심하다지만 겉모습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누군지도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폭소를 자아낸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겉모습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고 지내는 사람들은 참 많다. 약한 사람에게 강하고 강한 사람들에겐 약한 사람들, 명품을 입으면 자신도 명품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 모두 겉모습이 바뀌었다고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사람과 똑같지 않을까?
4. ‘나는 누구일까?’에 대한 고민의 시작
어찌 보면 주인공은 겉모습이 바뀌자마자 자신과 겉모습을 동일시하는 사람들보다는 건강해 보인다. 주인공은 자기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습과 바뀐 겉모습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한다.
대부분의 옛이야기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확실한 마무리를 하는 것과는 달리 이 이야기는, 정신없는 사람이 고민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현대 문학 작품으로 말하자면 열린 결말인 셈이다. 옛이야기에서는 보기 힘든 아주 낯선 형식이다.
주인공이 본래 자기 모습을 찾았을지, 아니면 자신이 진짜 중이라 생각하고 절로 들어갔을지,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주인공이 어느 쪽으로 결말을 내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비록 주인공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타의에 의한 것이기 하지만, 이 또한 크게 중요하진 않다.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계기는 늘 외부의 자극에서 오기 때문이다.
5. 생각을 못하게 되는 까닭
주인공만큼은 아니라도, 우리는 살아가며 늘 정신없는 상황에 놓이곤 한다.
하지만 “왜 이렇게 정신이 없지?”, “또 깜박했네.” 하고 나면 더는 고민하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상황에 또다시 놓이곤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볼 때면 뉴턴이 떠오른다. 뉴턴이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달걀 대신 시계를 냄비에 넣고 삶았다는 일화 때문이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개와 고양이를 길렀던 뉴턴은 개와 고양이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도록 벽면에 구멍을 두 개 뚫었다고 한다. 먼저 고양이가 다닐 수 있게 구멍을 뚫었는데, 그 구멍으로 개는 다닐 수 없을 것 같아 옆에 큰 구멍을 하다 더 뚫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친구가 그 구멍을 보고 “큰 구멍 하나만 있으면 같이 다닐 수 있지 않느냐?”고 하자 “아, 참 그렇군.” 했다고 한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 뉴턴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화다. 어쩌면 연구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뉴턴이 이렇게 연구에 빠져든 까닭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즐거움에서 왔다면 좋았겠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뉴턴은 늘 동료 과학자들에게 지나친 경쟁심을 갖고 있었고, 혹시나 자신의 성과를 남에게 빼앗기진 않을까 전전긍긍했다고 한다. 그러니 어쩌면 뉴턴의 정신없음과 생각없음은 연구에 대한 강박증에서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다. 아이가 다섯 살에서 여섯 살로 넘어갈 무렵이었다. 이사를 한 지 얼마 안 돼, 아이는 유치원에 가지 못하고 집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무척 바쁜 일이 있어서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컴퓨터 앞에만 있었다. 아이는 혼자 놀다 전기밥솥의 밥을 퍼서 밥을 먹자며 나를 부르기도 했다. 아이에게 미안했지만 일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가 차린 밥만 먹고 또 컴퓨터 앞에 앉는 일이 반복됐다.
그러자 하루는 아이가 방문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일 그만해. 너무 일을 많이 하면 생각을 못 하게 된단 말이야.”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 한 가지에 매몰되면 거기에만 빠져서 생각할 수 없게 된다는 진실을 아이를 통해 발견하게 된 것이다.
6. 정신없는 사람, 잊음이 심한 사람은 무엇에 빠졌을까?
한 가지에 빠져 생각을 못 하게 된 건 정신없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오로지 한 가지만 생각한다. 담뱃대를 쥔 손이 앞으로 왔을 때 눈에 띈 담뱃대에만 집착한 주인공은 손이 뒤로 가면 담뱃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 담뱃대만 찾는다. 똥을 누려고 갓을 나무에 걸 때는 갓만 생각하고, 똥을 눌 때는 똥만 생각하느라 다른 건 잊는다. 그래서 똥을 누고 일어설 때 갓이 머리에 부딪치자 그 갓이 자신이 걸어놓은 갓이라는 사실을 잊고 갓을 주웠다며 좋아한다.
한 가지 일에만 빠져들어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조금 달리 말하자면, 세상을 오로지 한 가지 시각으로만 보는 것과도 같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면 모든 건 자기식대로 해석되고 자기 세계에만 갇히고 만다.
‘건망증 심한 할아버지의 담뱃대 찾기’(대계, 경북 문경, 김분이 구술)를 보면 정신없는 사람은 자기가 물어봤던 것을 잊고는 중에게 어느 절에 가느냐고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같은 중이라는 사실은 모른 채 자신 있게 이렇게 말한다.
“내 오늘 당신 같은 사람 백 명도 더 봤소.”
7. 정신없는 사람이 되지 않는 법 – 사족
정신없고 잊음이 심한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공감이 될수록, 주인공처럼 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게 된다. 결국 주인공의 행동을 자꾸만 되짚어보게 된다. 그리고 정신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눈앞에 있는 것에만 빠져들면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럼,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다. 눈앞에 있는 것에만 빠져들지 않으려면 주위와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은 내 시야를 넓혀줘 눈앞의 것에만 빠져드는 걸 막아준다. 소통을 해야 내가 눈앞의 것에만 빠져들었을 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친구도 만날 수 있다.
세상은 내 손끝에 있지 않다. 세상은 넓고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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