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매일 진화한다
12월 31일 밤 12시, 아이가 네 살에서 다섯 살로 넘어가는 순간이었지요. 텔레비전에서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새로운 해가 밝았음을 알리고 있었죠. 저는 아이에게 한마디 했죠.
“이제 종이 울렸으니까 모두 한 살씩 더 먹는 거야. 너도 이제 네 살이 아니라 다섯 살이야. 축하해!”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의 표정이 밝지 않았어요. 저는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갔죠.
아침이 밝았어요. 아침에 눈을 뜨면 늘 책을 읽어달라고 가져왔는데, 늘 가지고 왔던 책이 보이지 않았어요. 《이슬이의 첫 심부름》(쓰쓰이 요리코 글/하야시 아키코 그림/한림출판사) 말이에요. 이 책은 아이가 두 돌이 좀 지났을 때부터 늘 끼고 살던 책 가운데 한 권이에요.
사실 이 책은 주인공인 이슬이의 나이도 다섯 살이고, 책의 구성을 봤을 때도 그렇고 4-7세 아이에게 권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너무 일찍 이 책에 빠져드는 바람에 좀 혼란스러워지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보는 책의 연령대가 딱히 정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빠른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거든요.
하지만 아이는 엄마의 걱정과는 달리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책을 봤어요. 때로는 “야, 정말 대단하다!” 하며 감탄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괜히 이슬이처럼 “꽈당!” 넘어지는 흉내를 내기도 했어요. 세 돌이 지날 때쯤에는 뜬금없이 “난 아직 네 살이라서 심부름을 못 하는 거야. 다섯 살이 되면 심부름 할 수 있어.” 하고 말하기도 했어요.
저는 아이가 이제 다섯 살도 됐으니까 한 번 읽어봐도 좋겠다 싶었죠. 그래서 책을 찾아들고는 넌지시 물었죠.
“이 책 안 봐? 네가 좋아하는 책이잖아. 엄마가 읽어줄게.”
그런데 정말 이상했어요. 아이가 그렇게 좋아하던 책을 안 보겠답니다. 그냥 안 보겠다는 게 아니었어요. 아이의 눈은 이 책을 피하고 있었어요. 지금 다른 책이 보고 싶어서 안 보고 싶은 게 아니라 이 책을 피하고 싶은 눈치가 확실했어요.
시간이 가면서 제 짐작은 맞아떨어졌죠. 아이는 이 책을 전혀 보려고 하지 않았어요. 아예 눈길도 주지 않았죠. 어쩌다 이 책 이야기를 해주어도 아이는 전혀 모르는 척했어요. 뭔가 아이 마음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어요.
그렇게 몇 달인가 시간이 지난 뒤였어요. 당시 저는 일 년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집 근처에서 작은 어린이전문서점을 하고 있었죠. 하루는 커피를 마시려고 하는데 프림이 없었어요. 슈퍼마켓은 문만 열면 바로 보이는 가까운 곳에 있었지만 사러 가기가 좀 애매했어요. 혼자였다면 쌩하니 달려가 사 오겠는데, 아이랑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죠. 그렇다고 아이를 데려가면 시간이 오래 걸릴 테니 문을 열어 둔 채 갈 수도 없었고요. 아이한테 넌지시 물었죠.
“프림 좀 사다 줄래?”
아이는 잠깐 머뭇거리는 듯했지만 곧 결의에 찬 모습으로 대답했어요.
“응, 나 프림 알아. 내가 사 올게.”
가까운 거리이긴 했지만 꽤 많은 차들이 오가는 골목이라 걱정스러운 마음에 문 밖에 서서 뛰어가는 아이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곧 아이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1-2분쯤 지나자 검정색 비닐봉투를 든 아이가 신나게 뛰어왔어요. 아이는 서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프림을 꺼내 보이며 늠름한 표정으로 말했죠.
“여기 프림. 아저씨가 동전도 넣어줬는데……. 여기 있다! 나 잘했지?”
이때부터였어요. 아이는 다시 《이슬이의 첫 심부름》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동안 이 책 왜 안 봤어?”
아이한테 넌지시 물어봤어요.
“으응, 네 살 때는 다섯 살이 되면 바로 심부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난 다섯 살이 됐는데도 심부름을 못하잖아. 근데 나 이제 심부름할 수 있다. 그치?”
아이가 이 책을 피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됐어요. 아이는 그동안 다섯 살이 되면 이슬이처럼 심부름을 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늘 다짐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딱 다섯 살에 심부름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아이는 너무 오랫동안 다섯 살에 심부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나머지 다섯 살이 됐을 때 자기가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괴로웠던 모양입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을 피하는 방법이 바로 《이슬이의 첫 심부름》을 안 보는 것이었고요.
아마 아이는 몇 달 동안 책을 피하면서 속으로는 늘 이 책 생각만 했을 거예요.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을 심부름 가는 연습을 했을지도 몰라요. 이슬이가 처음 심부름을 가서 가게 앞에서 실수를 했던 걸 떠올리며,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을 거예요. 그리고 드디어 용기를 내서 도전을 하고, 마침내 해내고 만 것입니다. 그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아이가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아팠지요. 하지만 이런 과정이 없었다면 아이는 이렇게 훌쩍 크진 못했을 거예요. 아이나 어른이나 아픔을 견디며 커나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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